20. 인연과 깨달음

 

1. 因緣이란 무엇인가?

因緣이란 무엇인가 하면, 오랜 劫 동안 심었던 씨앗(因)이 오늘에 감응하는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業이라 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緣이라 하며 이를 시절인연이라는 말로 표현 하기도 합니다.

緣을 만남은 불조 성현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일반 중생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한 果報의 緣이 성숙됐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고 있으므로 이를 구태여 멀리하려 거나 또는 빨리 얻으려고 애쓰지 않고 소가 닭을 쳐다 보듯이 무심하게 맞이할 뿐입니다. 기쁨 슬픔에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道理를 모르는 사람들은 좋으면 구차하게 얼른 가지려 하고, 싫으면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른 가지려는 욕심이 이루어지면 금세 뽐내고 과시하다가,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는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탄식과 원망을 그치지 않습니다.

業緣은 한번 定해지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는 事實을 확연하게 알고 있으므로 깨달은 수행자는 평생토록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더 기뻐하지도 않으며, 죽도록 싫어하는 것을 만난다 해도 더 노여워하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삼신불이 작용할 수 있도록 농사짓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바른 인연 공덕을 지어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수행방법은 바른 인연을 지어가고 또 기다리는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그 인연 공덕이 익고 또 익어서 그 果報가 만개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2. 말로써 깨달을 수 있는가?

무엇을 깨달음이라 할까요? 깨달음은 억겁의 세월동안 쌓였던 미혹의 業習을 맑히고 밝혀 수행자 자신의 본래 자리(本來面目)로 직접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개인적인 智識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깨달음을 말로만 설명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탓하듯이 자기 몸에 묻은 業習은 씻어내지 않고서 남의 몸에 묻어있는 오물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직접 業習을 맑히고 또 밝히는 행동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전국의 빼어난 인물들이 다 모이는 서울을, 저 지방에 사는 더벅머리 총각이 직접 가보지도 않고 서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者'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울에 대한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설명은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수행자라면 어찌 그 말에 의지하여 서울 사정을 알려고 할 것이며, 더구나 실없는 말이나 연구하여 헛된 것을 찾으려는 禪僧이 되려 하겠습니까?

발심한 수행자라면 반드시 양식을 준비하여 튼튼한 신발을 신고 천리나 먼 길이라 해도 서울을 향해 고생을 무릅쓰고 꾸준히 걸어갈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몸소 서울에 도착하면 화려한 빌딩과 많은 인파, 번화한 문물과 엄청난 부귀를 직접 보게 됩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직접 서울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본 사람이라야 고향에 되돌아가서 서울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훌륭한 것을 억지로 천한 것이라 하며, 종일토록 자기 멋대로 말하더라도 결코 그가 몸소 보았던 眞實만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깨달은 자는 法에 自在한 사람이다'라고 하며, 몸소 도달해서 본 사람과 도달하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하는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른 수행길을 걷기 위해서는 옛 스승이 걸어간 발자취를 부정하고서는 결코 無心의 길에 바로 들어설 수 없는 것은 확실한 철칙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렀던 옛사람들의 어록을 등불로 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나 이치를 헤아려 다가가지 않고 머리로 외워 알음알이로 주장을 하다가는 수행은커녕 스스로 죽는 사약을 들이키는 것과 같으며, 남따라 장보러 가는 것과 같은 형상이니 無心의 그릇을 만들어 파는 시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요절이 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대장부 스스로 하늘을 찌를 意志가 있거늘 如來가 간 곳을 向하지 말라" 당나라 때의 고승 취암가진선사의 말입니다. 禪은 대장부가 되는 길입니다. 대장부는 남이 간 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설사 그 길이 부처가 간 길이라 하더라도, 남이 간 길을 답습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고독하게 개척하는 것이 수행자가 택해야 할 德目입니다.

"百尺竿頭進一步" (동산 법연선사)

禪은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입니다. 수행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 되었다고 손을 놓으면 뜸들이지 않은 밥처럼 설 익을 것입니다. 수십길 가파른 절벽의 마지막 난간에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가 수행자의 세계입니다.

3. 無益한 수행의 열 가지 유형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셨던 靑梅조사는 다음의 10無益頌으로 후세 수행자들이 지나치기 쉬운 부분들을 경책해 주셨습니다.

마음으로 返照하지 않으면 아무리 經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
(心不返照看經無益)

부처님의 正法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苦行을 해도 이익이 없다.
(不信正法苦行無益)

因果應報를 가벼이 여기면 아무리 道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輕因正果求道無益)

믿음과 眞實이 없으면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이익이 없다.
(心非信實巧言無益)

본래 空함을 체달하지 못하면 아무리 坐禪을 해도 이익이 없다.
(不達性空坐禪無益)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眞理를 배워도 이익이 없다.
(不折我慢學法無益)

지도할 德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대중을 거느려도 이익이 없다.
(欠人師德聚衆無益)

잘났다는 我慢이 꽉 차 있으면 아무리 有識해도 이익이 없다.
(腹滿慢교有識無益)

남에게 자신을 맞추지 못하면 아무리 남과 어울려도 이익이 없다.
(一生乖角處衆無益)

안으로 참다움이 없으면 밖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이익이 없다.
(內無實德外儀無益)

뿔처럼 튀어나와서(괴각:乖角)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들 그것이 삶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어울려 함께 살면서도 각자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더불어 사는 삶, 즉 WIN-WIN GAME을 할 수 있는 힘과 智慧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4. 마음을 어디로 向할까?

어두운 과거를 자를 수 있는 원대한 힘은 미래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합니다. 미래에 대한 確信이 있어야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걸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질만이 존재하는 전부로 생각하면 크나큰 우를 범하게 됩니다. 부피, 질량, 빛을 가진 즉 오감으로 인식이 가능한 有爲系 절반과 이것에 상응하지만 오감으로는 인식이 불가능한 無爲系 절반이 합쳐진 것이 存在의 實像이기 때문입니다.

만상은 뒤집고, 세우고, 젖히는 등 다종다양하게 變化시킬 수 있으나 존재하는 것들의 기준점은 道理에 뿌리를 박은 禮를 바탕으로 합니다. 삶이란 禮를 이행하기 위해 윤회하고 있는 중간과정에 불과합니다. 수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道는 바른 禮를 벗어 나면 좋은 因緣 짓기가 참으로 어려워 집니다.

구분할 수 있는 理性과 완벽한 體를 갖춘 인간으로 윤회하고 있을 때, 집착을 놓고 해탈하지 못하면 業은 더욱 더 무거워 지고, 껍질은 두꺼워져 태초의 순수 본질과 마음이 하나되기는 점점 어려워 지므로 인간으로 있는 이 生이 인연의 사슬을 교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변환의 마지막 종착점이며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많은 시작점으로 이해하고 수행에 임하여야 합니다.

5. 오늘의 Key Word

옛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으레 말로써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 (大慧 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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