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문자가 지칭하는 실체
1. 이야기
한 젊은 교수가 뱃길로 먼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적었습니다. 그와 함께 간 승무원
가운데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늙은 항해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매일 저녁 젊은 교수의 방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노인은 젊은 교수의 학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느날 저녁, 대화가 끝나고 돌아갈 때 교수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리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지구에 관한 학문입니다.”
“아니오. 나는 학교나 대학에 다녀 본 적도 없고 무엇을 공부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놓쳤군요.”
항해사는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그처럼 많이 배운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나는 인생의 4분의 1을 낭비했다.’
다음날 저녁, 다시 젊은 교수는 항해사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해양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바다에 관한 학문이죠.”
“아니오.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은 인생의 반을 낭비했습니다.”
항해사는 더욱 우울해져 돌아갔습니다. ‘나는 인생의 반을 낭비했다.’
그 다음날도 이 젊은 교수는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기상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아니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
무엇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지구에 살면서 지리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당신 삶의 터전인 바다에 관해
공부하지 않았으며, 매일 접하는 날씨에 관하여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습니다.”
늙은 항해사는 매우 슬펐습니다. ‘이 학자는 내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다고
말한다. 정말 나는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음 날은 늙은 항해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젊은 교수 방에 달려가서
외쳤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수영법을 공부했습니까?”
“수영법, 무슨 말입니까?”
“헤엄을 칠 수 있냐구요.”
“아니오. 나는 수영하는 법을 모릅니다.”
“교수님,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어요! 배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으면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해안으로 헤엄쳐 갈 수 있으나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은 익사해
버립니다. 미안하지만 교수님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습니다.”
누구나 세계의 모든 학문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영에 관하여 학문적인 논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물 속에 직접 뛰어들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수영하는 방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2. 마음의 흐름
겉 모습으로 드러난 언어와 문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접하는 인연자의 ‘業 에너지’의 量만큼 감응되어 그 만큼 그렇게 이해될 뿐입니다.
수행자가 호기심의 발로이던 자의에 의한 접근이던 문자와 말에 끌려 지식을 쌓아가는 知識慾 즉 탐심에 맛들여 있다면 자기의 순수의식을 표출시켜 자연의 섭리와 더불어 감응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언어와 문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이면의 뜻을 알려주기 위한 가교의 역할일 뿐이지 언어와 문자로써 실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표현하여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의 작용은 시절인연에 맡겨져 있습니다.
언어와 문자가 지칭하는 근원은 그 언어와 문자를 접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즉 그들의 성품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觀하지 않고 항상 옛 성현들의 문자에서만 진리를 구하고 찾는다면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단지 수고로울 뿐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합니다.
수행자가 언어와 문자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성품을 놓고 비우고 버리는 순수의식으로 向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순수한 마음이 되었을 때에만 언어와 문자는 감읍(感泣)하게 되며 그 이후 보이는 문자는 모두 法으로 새롭게 드러나게 됩니다.
걸림 없는 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언어 문자 이면의 실체와 감응(感應)하기 위함이지 문자와 말을 이용한 지식과 이해력을 자랑하고자 함이 결코 아닙니다.
중국 宋代에 와서 사람들의 바탕이 워낙 용열하므로 毒을 毒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祖師들께서는 그 증세에 맞는 약을 話頭라는 이름으로 참구하게 하였으나 그것 또한 실은 망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말이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며 마음은 곧 말의 원천[頭]입니다 즉 話頭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상태를 지칭하고 있으므로 한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면 이미 話頭가 아닌 話尾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의정(疑情)을 일으켜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정 그 자체가 이미 화미(話尾)에서 용심(用心)하게 되므로 이는 곧 생멸의 법이며 마침내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즉 話頭法은 수행의 한 방편일 뿐이지 궁극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3. 오늘의 KEY WORD
참 禪은 언어와 문자를 벗어나 존재의 실체와 作用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