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佛紀와 가야불교
불교의 기원은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이 아니라 입멸로부터이며, 佛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佛紀는 BC1027년 갑인 4월 8일 고타마 싯타르타 태자가 탄생하여 BC948년 임신 2월 15일에 입멸하였다는 설로서 서기 2003년 癸未年은 佛紀 3030년이 된다. 스리랑카에 전해오는 BC543년 설과, 태국과 미얀마에 전해오는 BC544년 설, 중성점기에 의한 BC485년 설, 가이거의 BC483년 설, 막스뮬러의 477년 설, 宇井伯壽의 BC386년 설, 中村元의 BC383년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북방의 기록은 BC383년 설이며 남방은 BC483년 설이 지배적이다.
현재의 佛紀 2547년(서기 2003년)은 인도 및 스리랑카에서 거행하였던 불멸 2500년 축제를 기준으로, 1956년에 열린 제 4차 세계불교도 대회에서 채택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1970년부터 지금의 불기를 사용하였다. 불교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 것은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고 암송하는 인도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도인들의 사유구조로서 특히 역사연대와 같은 인식은 아주 희박한 편이다. 그러므로 인도 고대사는 중동이나 이집트 등 주변국가의 역사와 대조하여 재구성하는 편이며, 석존의 입멸을 추론하는 중요한 역사근거인 아쇼카 왕의 재위마저도 차이를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도인들의 정신세계 풍토에서 기인한다.
북방이나 남방의 佛紀 이전에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佛紀에 대해 신빙성을 더 부여하는 것은 가야 불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가야국은 오늘날 김해를 중심으로 신라에 흡수되기까지 3백년의 앞선 역사를 가졌으며, 이웃나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친 문화적으로 상당히 번성한 나라였다. 특히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인도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의미있는 사건이다. 김수로왕의 처남이 되는 장유화상이 인도 승려라는 사실과 허왕후의 소생 일곱 왕자를 지리산으로 출가시킨 가야역사는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들을 불교에 귀의시키므로 골육상쟁을 미연에 방지한 무소유 불교정신의 실천도 돋보이지만 동방의 소국인 가야의 왕이 인도라는 먼 이국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는 분명 불교가 그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당시 포교목적으로 가야에 들어왔을 승려 장유화상과의 교분과 혼사를 통하여 포교의 극대화를 꾀하기 위한 정략이 아니라면 2천수백년전의 가야 불교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장유화상은 지금도 남아있는 진해 용원의 허씨 바위 전설처럼 인도에서 그의 여동생을 배에 태워 가야로 들어와 김수로왕과 혼사를 맺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수로왕과 인도여인과의 결혼은 단순한 혼사문제가 아니라 북방불교라는 우리의 불교가 중국을 거쳐오며 그 지방 토속종교와 희석된 면이 적지 않은데 인도에서 바다를 통하여 직접 들어온 가야불교는 불교의 진실과 사실성에 있어서도 훨씬 앞섰을 것이다. 오늘날 불교국가라고 부르는 신라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아도화상을 통하여 서라벌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가야에는 장유화상을 통하여 때묻지 않은 인도불교가 들어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연대로 보아 정통불교에 가까웠을 가야불교의 맥이 끓어진 것은 아쉽게도 신라에 흡수된 가야의 불운과 권력과 함께 자라 온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