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길
<불교세계/2001.3月號, 풍경소리>
지금 세상은 한층 더 개방되고 밝아져 간다. 보편화된 인터넷을 통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정보를 섭렵하여 뜻을 성취하고 내면의 의심을 녹여낼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첨단문명에 힘입어 동시다발적으로 시공간(視空間)이 법당(法堂)이며 처처(處處)가 불상(佛像)임을 체감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정보바다에서 언제라도 진리의 가르침을 접하여 번뇌에 얽매이던 내면세계를 손쉽게 정화시킬 수 있다. 즉, 깨달음을 위하여 생업을 저버리거나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사이버공간에서 사고영역을 극대화시켜 무명(無明)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깝고도 쉬운 길이 목전에 도달하였다.
인간의 번뇌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그 원인이다. 집착이라
일컬어지는 탐욕과 어리석음은 분명히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훈습(薰習)으로서 인간일
때 정화하지 못하면 반드시 업(業)으로 남게 된다.
업인(業因)은 무명(無明)의 아버지이며 번뇌의 본가(本家)이다. 이것은 전생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금생을 살면서 보태어진 훈습(薰習)이 남긴 정신인자로서 근시안적이고
부정적이며 소심한 생활관에 기생한다. 집착은 아집과 편견으로 성질이 드러나 보이며
질감은 어둡고 무거운 정신에너지로서 육도 윤회의 근원이 된다.
무명(無明)을 밝히는 깨우침의 불씨는 인연으로부터 빌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문명이 꽃을 피우는 첨단시대에 태어나 살게 된 이 자체가 전생 공덕의 결과이기에 자신을 성찰하려는 작은 의지만 있으면 목전의 첨단이기를 통하여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 대다수 사람들은 정신수행은 물질과는 담을 쌓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정신사조는 선각자의 가르침을 왜곡한 암울한 시대적 오류다. 마음수행에서 물질을 정신으로부터 분리 해석하는 것은 영원성이 없는 물질로 인하여 빚어지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에서 비롯한 것이다.
첨단을 지향하는 물질문명을 올바로 계도할 힘은 정화된 인간의 정신에너지 뿐이다. 중심(中心)이 올바로 잡힌 인간의 정신력만이 급변하는 물질계와 뒤뚱거리는 정신계를 융화시켜 보다 나은 인류공동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으며 그러한 묘(妙)는 깨달음에서 나온다.
깨달음은 초월의식으로서 색(色)에 맛들이거나 속지 않으며 현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초월의식은 무슨 신(神)과 통속하는 영적 감응이나 허상인 절대신(絶對神)에 의존함도 아니며 추상적 논거(論據)와 미시적(微視的) 형상에 기대임도 아니다. 깨달음은 작위에 묶이지 않는 초자연적 순수의식으로서 그것은 해상도가 탁월한 디지털 카메라가 공간을 훑듯한 밝고 객관적인 의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상(相)에 묶이지 않아 시공간 영역을 섭렵하는 기동성이 탁월하며 분별의 틈새가 없어 가장 과학적이고 효과적이다.
시대와 완전한 조화를 이룰 인간 조건은 깨달음뿐이며 참 선법(禪法)에서 해법을 얻을 수 있다. 참선은 직관력의 배양으로서 인식의 편차를 좁혀 불필요한 생체에너지 소모를 방지하는 순기능이며 이러한 이치를 흔히 번뇌가 쉬는 고요라고 통칭한다. 잘 익은 고요는 전광석화와 같은 기민성으로 무명이 개입할 틈새를 미연에 차단한다. 이러한 심신(心身)에너지를 함양한 것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이며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다.
21세기는 작위와 모순이 타파되어지고 순 기능을 체득한 해탈자가 많이 생겨나 비합리적이고 비 능률을 배제시키며 정신사조의 대명사인 종교 또한 예외가 되지 못한다. 물질 문명이 열악하던 시대, 욕구에 목말라하는 인간의 가치관에 파고들어 안주하던 제 종교도 순 역할이 없다면 도래한 첨단시대와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대 자연 법칙은 반드시 본래로 회귀하며 그 어떤 인간이나 규약도 원래를 지향하는 순리를 거스르지 못한다. 인과법칙에 입각한 분명한 이론과 수행체계를 갖추지 못한 종교와 진리라는 미명아래 신비와 잡설로 끼워 맞춘 정신계는 아침이슬처럼 소멸될 것이다.
인터넷 선원은 사이버 공간에 펼쳐놓은 무한법당(無限法堂)으로서 무작위로 돈법(頓法)을 전수하여 깨우침을 나누는데 있다. 제방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사이버 牛谷禪院 역시 대다수 사람들이 인터넷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 사이버 선원을 개설하여 다가올 첨단시대에 부응코자 하였으며 그러한 결실이 지금의 현실에 적중하고 있다. 불과 한 시대 전만 하여도 선지식을 찾아 한마디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괴나리봇짐을 꾸려 몇 날을 달려가야 했으며, 더 깊은 공부는 혹독한 인고를 거쳐 신심을 돋운 후에야 비로소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다지 멀지 않은 근대사의 일이 였으며 그때를 반추하면 지금은 호박이 덩굴째 굴러다니는 호시절이다.
첨단시대와 조화를 이룰 대안은 깨달음뿐이다. 선(禪)적 사유가 아니면 여하한 수행과 방편으로도 지속적인 내적 평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선법(禪法)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첨단의 정신에너지임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시대가 우리들에게 도래했으며 결코 보편적이지 않던 참선이 다원화 사회에 가장 알맞는 심신(心身)수행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으로 보아 선(禪)이 인류를 계도할 제 3의 종교로 틀림없이 자리 매김 될 것이다.
조사어록(마조) 한 토막을 해제하여 선(禪)에 입각한 마음
정(定)하는 법을 피력하면,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평상심(平常心)이 도다. 평상심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想)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을 나누지 않는다.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빠져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를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깨달으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 달리 닦을
것도 없고 정할 것도 없는 경계가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았으면
계행(戒行)을 더욱 청정이하여 정업(定業)을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