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추운 겨울날 냇가에 지펴진 모닥불은 참으로 정겹습니다. 얼음을 지치며 놀던 아이들은 손발이 차가워지면 개울가 모닥불 곁에 모여 언 몸을 녹이고 젖은 신발과 옷가지 등도 말리면서 모닥불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처음에는 따뜻한 불기운에 무척 재미있어 합니다. 그러나 멋모르고 모닥불 가에 오랫동안 머물면 화기에 취해 그 날 밤은 끙끙 앓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심지어 불기운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닥불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아주 유용한 에너지원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열을 끓어 올리게 하는 원인이 되어 아이의 목숨을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모닥불을 잘 활용하면 최상의 안락을 얻게 되지만 계율을 잘 모르는 아이가 무턱대고 불꽃을 너무 가까이하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중생은 누구나 아이들의 젖은 옷가지와 같은 눅눅한 습기를 영혼에 담고 이 세상에 태어난 전생 훈습을 포용한 채로 살아갑니다. 대다수 자만에 젖고 탐욕에 잦아든 습(濕)한 기운들이 자아를 휘감고 있지만 모닥불을 알맞게 쬐지 못하면 젖은 훈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삽니다.
인간은 스스로 운명의 창시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주어져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닥불 곁에서 젖은 옷가지를 말리듯 내면의 어두운 기운인 습기를 말릴 수 있는 동기부여가 적절하면 이생에 모든 숙업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비우고 놓아버린 이후 무소유 처에 이른 마음 즉, 무심(無心)을 직접 체감할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에 귀로 듣고 눈으로 익힌 것에서 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주변을 잘 살펴보면 젖은 의식의 전환을 꾀할 요소들은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습니다. 일상의 번뇌가 곧, 지혜의 종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닥불 기운은 깨달음의 단초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언어로 통용될 수도 있고 직접적 인연 동기에 의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모닥불의 열기가 전도되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씨를 든 아이가 산천초목을 불 싸지르지 않을 수 있는 올바른 인간으로 성숙될 성향이 있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아이에게 불씨를 들고 다니게 하는 것이 진리의 스승인 자연의 법도입니다. 사람이 바르게 살아갈 도리 외에는 진리의 실상인 불씨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영역을 벗어난 평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존재의 근원에 귀의하는 실천적 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지고한 깨달음은 자리이타의 공력이 화현(化現)한 시절인연으로 다가오기에 여기에 이르고자 한다면 스스로 신심을 기르고 참 사람의 도리를 길러가야 합니다.

사람이 내뱉는 언어는 그의 마음 모습이며 또한 정신에너지 함량입니다. 근자 牛谷 인터넷 선원(禪院)에 띄워지는 글 중에 참 선(禪)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든지 또, 무슨 선(禪)을 가르친다는 자칭스승들의 마음 모습이 유리알처럼 비추어 집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마음은 돌지 않는 풍차를 보는 듯합니다. 글은 마음의 모습이므로 식견으로 투과되는 어투는 수미산보다 더 높은 지식을 쌓고 있는 듯 한데 비루하기가 한량없습니다. 비록 옛사람 일을 비유로 들지만 식(識)은 이미 죽어버려 근본참선하고는 아무 관련 없는 것들뿐입니다. 사견은 선문(禪門)에 폐해를 끼치는 죄업이며 그로 말미암아 퇴락한 정신 사조는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급속히 그리고 당연히 확산되고 또 전염됩니다.

죽어있는 의식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인마저 죽게 하는 병원균과 같습니다. 그것은 육근으로 익힌 알음알이를 공부로 삼은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부류는 계율과 믿음 없이 무턱대고 모닥불을 쬔 부작용으로 상기(上氣)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이루겠다고 보고 듣고 맛본 것들이 뇌에 쌓이게 되면 마치 천장에 매달려진 듯한 상기현상이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도 한 곳으로 모아진 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잘 와 닿고 밝아 무엇이 되어진 듯 희열에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깥경계로부터 얻어진 것으로 남의 것에 불과합니다. 짝사랑이 지나치면 상사병이 되듯이 타력에 의한 어설픈 힘은 환상(幻想)을 짓고 돌지 않는 풍차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순화되지 못한 불씨를 들고 다닐 자(者)에게 다음 단계로의 진행을 결코 용인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쌓고 경험으로 익혀 그 노력과 형상이 한량없이 높고 크다고 하나 그것이 무상 도리는 아닙니다. 분별이 끊어진 무념(無念)은 육신의 기혈이 원활히 회전할 때부터입니다. 8만 4천 가르침은 무념에 이르기 위한 방편설로서 중생의 사고가 선각자들의 삶의 거울에 어긋나지 않는 마음씨를 말합니다. 그것은 이치를 통달한 정신에너지로서 반드시 생사(生死)를 뛰어넘는 힘으로 거듭나며 인연법의 결과입니다.

이치를 통달한 힘의 원천은 다음에서 생성되어집니다. 음양(陰陽)의 조화에 의하여 생명이 태동됩니다. 생명력의 본질은 양(陽)의 기운인 화기(火氣)이며 생명의 태동은 수기(水氣)의 본성인 음(陰)으로부터 왔으며 두 기운의 완전한 조화가 문자이전의 깨달음이고 평정에 이른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가 말과 문자를 뛰어넘은 해탈의 본래면목입니다. 모닥불은 중생의 습기를 말리는 원천이지만 멀리도 가까이도 아닐 수 있는 기민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안타깝게도 경계를 점검하는 선지식 인연이 없으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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