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은행나무
오늘 아침 출근길에 학교 담장 위로 높이
솟은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한 사내가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고 있다. 장대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노란 은행 알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대나무 장대가 하늘을 가르면
길가에 세워둔 차 지붕에서는 요란한 파열음이 일어나면서 은행이 짓뭉개어지고 연이어
하얀 속살이 불거져 나와 아스팔트를 메우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길가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에 걸맞지 않게 잎새는 아직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거리를 가득 메우는 파괴의 상흔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의 뇌리는 아직 여름과
가을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와 닿는 충격의 여파는
컸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가린 푸른 은행나무 잎새와 아스팔트
위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 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가을이 오면 나는 작위가 없는 농부의
심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위함이라던 꿈이 있었기에 예상치 않게 벌어진 때 이른
가을의 참상이 큰 충격으로 와 닿는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을 안겨다 주는 계절이기 전 잔인함이 먼저인 듯 파란 잎새와 관계없이 장대를 휘두르는 사내가 있어 은행나무 가지를 두들겨 패는 것이 정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가을은
노란 잎새와 풍성한 결실을 연상케 하는 만복의 모습으로 천천히 다가왔었다. 그러나
도심 한 복판의 가을은 아직 계절에 알맞은 색상과 열매의 관계가 성립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대나무 장대가 바람을 가르면서 때 이른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이맘때면
설래임을 일으켜 주던 수확의 기쁨보다는 도심의 가을은 잔인한 차가움이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도회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옥죄어진 질서와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변 환경 탓인지 무위의 절대
법칙인 섭리를 순순히 따를 수 없는 조급함이 먼저 발동하는 모양이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노란 은행 열매가 파열음을 내면서 나뒹구는 이 길은 사대문 안에서는 유일하게 고전적인 정취가 아직 남아있는 곳이다. 안국동 초입의 은행나무 길은 건너편의 거리모습과는 별 무관하게 화려함을 탐하지 않는 듯하다. 길 양쪽으로는 높다란 학교 담벼락이 길게 뻗어 있어 번잡함을 차단해 주고 반대편은 성벽을 쌓듯 오밀조밀한 돌로 담장을 쌓은 외국공관이 있어 고전적인 풍취가 있다. 이런 정취가 고풍스러움에는 다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적한 어느 시골 마을을 연상케 하고 있어 나는 안국동에 살고 있는 것에 아주 만족해하는 편이다.
내가 사는 동네인 강북 안국동에서 사무실이
있는 강남 역삼동까지는 승용차로 이동하면 약 한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되면 시간도 절약되고 사람 사는 맛도 느낄 수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용버스를 이용한다.
퇴근 때면 강남 전철역에서 광화문 오는
직행 버스를 이용하게 되는데 이때 종로 3가 어귀에서 내려 인사동 골목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길 양편을 가득 메운 옛 풍물을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있고 또 깐데리아 불을 밝혀 놓고 좌판을 벌이고 있는 벼루 장수와 상투 머리에 갓
쓴 부채 장수 등과 눈인사를 하게 된 지도 꽤 오래다.
인사동 길은 화려함이나 첨단의 물질이 없어도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배어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네는 누가 인위적으로
통제하지 않아도 철없는 방종과 인간다운 예를 잃어버린 시대의 방탕이 끼어 들지
못하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 올바른 기운이 서려있는 장소에서는 비록 인성이 미혹한
사람일 지라도 함부로 날뛰거나 방종이 통용될 수 없는 것이 물질 이면의 근원적
위계질서다.
어둠이 짙어지는 퇴근길에 인사동 육교를 건너 안국동 초입에 들어서면 담 넘어 어디쯤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 올 것 같은 착각에 어떤 때는 온 몸에 짜릿한 경련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길은 풍성한 은행나무 잎새가 괴괴한 달빛을 받아 폭넓은 그림자를 길바닥 위에 드리우고 있다. 이렇게 운치 있고 조용한 골목길을 걷노라면 호젓한 산사를 걷는 듯한 느낌이 묻어 나서 좋고 그때 담벼락을 타고 불어오는 소슬바람이라도 한 점 일면 달 그림자에 취한 은행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 멀리서 찾던 즐거움이 이 거리에도 가득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거의 매일 이 길을 지나다녀도 은행나무에 열매가 매달려 있는 줄을 몰랐다. 항상 쫓기는 생활에 매달려 사느라 어쩌면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삶은 여름 내내 시원스런 그늘과 밤이면 운치있는 거리를 연출해 주는 싱그러운 잎새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위안이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상한 세월의 자국은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처연한 상흔으로 다가와 오랜 계획과 일상의 작은 즐거움마저 한꺼번에 앗아가 버린다. 세월에 삭여 진 내 미련함은 길바닥에 나뒹구는 은행 알 인가!
아직은 멀리 있을 것으로 여겨온 나의 가을은 은행 알 파열음에 화들짝 놀라 버린 지금 시간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기에 오늘은 안국동 은행나무에 얽힌 이 가을 꿈을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