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無心)세계로 귀의
<불교세계/2002.2月號, 풍경소리>
무심(無心)은 불법(佛法)의 기축이며 사람이 시공간을 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도구와 같다. 또한 사대에 의존한 유정으로서 다가갈 수 있는 가치관의 극점이며 모든 심신수행의 꽃이다.
오늘은 선(禪)의 배를 타고 부사의(不思議)한 무심 세계로 귀의하는 정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禪)은 무심(無心)의 본가로서 대해(大海)와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 바다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으며, 맑고 탁한 것을 가리거나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는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터전으로 가장 넓은 형상을 만들고 온갖 찌꺼기를 정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정된 상을 짓지 않는다. 또한 얼고 녹고 수증기로 변하는 신통을 부리면서도 유순하기에 적재적소에 꼭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막히면 산도 뛰어넘는다.
무심(無心)은 선(禪)과 한 몸이듯 내가 소속되고 누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선(禪)의 대상 아닌 것이 없다. 단지 겁을 윤회해 온 인간의 훈습[識]이 쌓여 원래처럼 무심으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인(因)이 되고 본질을 그르치고 번뇌를 양산해 내느라 종일토록 바쁘다. 이처럼 올바로 통하지 못하여 고(苦)를 양산하는 것으로부터 단순 명료한 선적 사유체계를 갖출 때 우리는 인과의 늪에서 벗어나 만상과 교통되어 과부족이 없는 열반적정에 들 수 있다. 만상과 통하기 위해서 놓고 비우고 버리며, 엄격한 율로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인고의 힘으로 사상(四相)의 장막을 뚫을 때 드러나는 이치가 참으로 아는 도리이자 무심이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이러한 무심을 이루는 방편설인 것이다.
사람은 깨어있는 의식일 때 비로소 나아갈 길을 알 수 있고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항상하지 않는 색(色)에 기대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인 무위세계의 법칙을 이해하는 마음수행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심신수행에 있어 문자나 상에 얽매이면 외도이고 생각 없음에 젖어 있으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다. 겹겹이 호구인 세속적 가치관을 초월하여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의 힘이 무심이고 참 선이다. 선(禪)은 삼라만상을 모두 다 수용하지만 앞세우면 바늘 끝도 허락하지 않는다.
선(禪)적 사유이자 불교 가르침의 핵인 무심(無心)이 되기 위하여 불도에 들어선 사람들은 진리의 가르침을 의인화시켜 놓은 갖가지 존상과 다양한 종교의식을 먼저 접하게 된다. 깨달음이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마음의 힘인 줄 잘 알면서도 방편이라는 미명의 온갖 상에 묶임을 당하는 것이 다반사다. 특히 어리석은 중생은 줏대가 없어 맹목적인 믿음에 함몰되거나 경계에 묶임을 당하게 될 소지가 농후하다. 종교에 의지하여 마음의 안정과 건강, 작은 행복을 누리겠다는 단순한 바램이 오히려 아집을 키우고 식(識)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이 첨단문명시대 처방전이 없는 병리현상이다. 인연이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하다.
달마대사의「혈맥론」한 구절을 빌어 무심한 부처가 되지 못하는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면 "깨달음은 자기 마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늘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어떻게 찾겠느냐 하였으며,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라 마음 떠나서 부처 없고 부처 떠나 마음 없는데 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무정물(無情物)과 언설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는가."라고 질타하였다.
또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는다."라고 하여 불자들이 행하는 모든 수행은 두 마음을 놓기 위한 방편임을 분명히 일러주고 있다. 나아가 "자성(自性)을 보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齋戒)를 지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과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스런 과보를 받겠지만 끝내 부처는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여 오로지 분별에 묶인 마음을 덜어내는 것만이 불법(佛法)임을 정의하고 있다.
결국 경전을 토대로 갖가지 마음 깨닫는 법을 공부하거나 근기 높은 선법을 이해하더라도 주관적 사고 위에 덧보태는 마음수행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선(禪)도 아니거니와 무심(無心)이라 할 수 없다. 참선공부에 있어서 가장 큰 병통은 관행적으로 이어온 종교행위에 맹목적으로 빠져들거나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비판 없이 옛 것을 답습하려 들면 백년을 염불하고 천생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여도 그것은 그러한 짓을 잘하는 사람일 뿐이지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 무심지혜를 가다듬는 마음공부는 아니다.
참선공부는 위없는 지혜(智慧)의 획득과 자비(慈悲)실천이다. 그것은 바로 무심자(無心者)의 삶으로서 중생심과 함께 하지 않을 뿐 겉모습과는 아무 상관없다. 무심삼매(無心三昧)는 오랜 선업(善業)의 결과이며 불연이 심어준 무심 씨앗의 인(因)이 화현(化現)한 것과 같다. 이때 비로소 무심이 부처마음이고 분별없는 그 마음이 중도이며 지혜가 항상하는 선(禪)적 사유가 바로 무심(無心)임을 확실히 체득하게 된다. 그것은 삼계(三界)를 뛰어넘은 도인으로서 그의 행동은 기민하고 단호하며 근면하여 업(業)이 그를 가로막지 못하는 대자유인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무심지혜(無心智慧) 즉,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무사안일로 소일하거나 신선노름에 젖는 것이 아니다. 社團法人 牛谷禪院의
종지처럼 선(禪)의 일상화 대중화 세계화를 위한 인간불사(人間佛事), 인재양성을
실현시켜야 할 저자거리 삶이 첩첩산중이다.
끝으로 참선(參禪)공부의 소중함을
'혈맥론' 해제 경책으로 비춘다.
"나고 죽음의 일이 크니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상에 속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기한 보물이 산같이 쌓이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더라도 눈을 뜰 때에는 보이거니와 눈을 감은 뒤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위의 법은 꿈이나 허깨비 같다. 만일 서둘러서 스승을 찾지 않으면 헛되이 한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중생이 불성을 본래 가지고 있으나 스승이 없으면 끝내 깨닫기 어려우니 스승을 만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독각자(獨覺者)는 선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생 선업(善業)으로 쌓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서 참구하여 배워야 한다. 선지식의 가르침에 의해서만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다행히 오달(悟達)하였다면 더 닦지 않아도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겠지만 흑·백이 분명하지 못하면서 불법(佛法)을 펴는 것은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욕되게 하는 죄업이 되어 생사가 끊어지지 않는 윤회 고(苦)를 끝없이 받게 될 것이다."
글: 牛谷 張明和 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