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신선놀음

 

지금 한반도에 태어난 우리들은 참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 기아와 전쟁이 없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지장이 없고 넘쳐 나는 물질과 활짝 열린 정보로 말미암아 반만년동안의 걱정거리였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더 별스럽고 더 나은 즐거움을 쫓느라 나라가 온통 시끌벅적거리는 판국이니 더 이를 말인가.

물질이 우선하는 시대는 우리보다 먼저 겪은 서구사회의 이면처럼 정서적인 가치관보다는 배금주의와 편익, 향락을 쫓는 풍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사회도 그와 별 반 다르지 않아 이기적인 속물들이 대세를 이루지만 다행스럽게도 허구적인 삶을 타파하고 진아(眞我)를 찾으려는 반듯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어 아직 보다나은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동시대를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중에 무엇보다 부처를 이루겠다는 서원이 가장 숭고하고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부처는 개인의 명리나 영화보다는 무욕(無慾)의 아름다움을 사무치게 깨달은 사람으로서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고 헌신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인류사회의 등불역할을 하는 부처는 보편적인 인간행을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진솔한 본래성품을 회복한 사람이다. 생사와 욕망이 들끓는 사바세상이 고통임을 깨닫고 애써 닦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마음의 힘, 즉 지혜(智慧)가 있기에 소아(小我)에 묶이지 않는 대보살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존재의 허구성과 자성(自性)을 회복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학(學)이나 빌어 구해서 될 문제가 아닌 성불도(成佛道)는 반드시 인연으로부터 무심(無心) 씨앗을 전수 받아야 하는 난감함과 그리고 수행정진으로 집착의 뿌리들이 낱낱이 끊어져야 하는 인고의 경계들이 첩첩산중이다. 해탈인연은 바램이나 거래로서 다가오는 속물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의 땅에 홀연히 심어지는 제불(諸佛)의 인가(認可)다. 발심이 늦으면 그만큼 지혜의 힘을 키우는데 장애가 많다. 이 몸에 의지한 영혼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때는 어찌하겠는가.

대오(大悟)하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원만한 지혜가 있다면 어디서나 위없이 가치있는 삶이 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해탈지혜의 오묘함을 잘 알지 못한다. 부처는 특이한 사람들의 영역이거나 아니면 복을 주는 주관자로, 종교는 죽음에 이르러 의탁할 영혼의 집 정도로 여긴다. 이러한 풍토로 말미암아 우리주변에는 온갖 이름의 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영혼장사판을 벌이고 있다. 잠을 자다가도 마음만 내키면 자질에 상관없이 아무거나 골라잡으면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지금이다. 살아서 부처가 되는 법을 일러주는 자력신앙이든 절대자가 주관하는 추종자의 권속이 되어지든 아무 상관없다. 절대자를 추종하는 종교는 개인의 탄생과 죽음마저 절대자의 권리에 속한다고 소리치고 있어도 인권침해 시비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절대자의 관리영역에 놓여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인과(因果)가 분명한 것을 재발견하고 입증하는 현대과학의 힘에 의지해서 지금처럼 잘 살고 있으면서도 대낮의 도깨비 기침소리보다도 더 못한 교리를 믿고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안달복달하는 현대인들의 정신구조는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불가(佛家)에서도 이름만 달리할 뿐 부처님을 인격체로 보지않고 절대자로 장엄하여 숭배하며 그 앞에서 빌고 매달리는 짓을 주업으로 삼고 남에게 강요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풍토 또한 고질병이 된지 오래다. 중생의 의식가운데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신(神)은 그 이름에 상관없이 모두 몸 없는 중생이다. 전생 무명(無明)을 다 해결하지 못하여 육도를 윤회 중인 몸 없는 중생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앞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어처구니 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육경(六鏡)이 사상(四相)으로 가로막히면 자성(自性)이 불(佛)임을 알 수 없어 미륵부처가 하생하여 일러주어도 어리석은 중생놀음을 그치지 않는다. 삼세(三世)가 마음 안인데 따로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중생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팥죽 끓듯하고 정신이 동분서주하느라 늘 바쁘다. 심상이 고요하지 못하니 처처(處處)가 불(佛)이고 법(法)인 이치가 분명하지 않아 노란부처 더 영험있는 부처를 찾느라고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것이 부처 문중의 낮 뜨거운 이력이다. 내가 저승을 유람할 때 접한 사실은 이승에서 길 모르고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한 자가 가장 큰 형벌을 받고 있었다.

부처는 분별상(分別相)을 해결한 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이고 죽어서 염라대왕에게도 걸리지 않을 영원한 재산을 확립한 사람이지 도 닦는 모습이나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출가사문이 신선(神仙)을 염원하는 것은 석가부처님에 대한 배신이고 시주 은혜에 대한 도발이며 사회에 대한 죄악이다. 나는 만행 중에 신선을 꿈꾸는 산중 도인들을 하도 많이 접해 봐서 이들이 바로 불도(佛道)를 피폐하게 만드는 무리라는데 일말의 의구심도 없다.
삿된 의식의 소유자가 황금가사를 걸치고 폭포 같은 법문을 설해도 그것은 구업이며 오물이다. 더구나 불문에서 외도들의 신(神)과 같은 존재인 신선을 그리므로 말미암은 업과 폐해는 수미산을 다 덮고도 남는다. 세간 벗어나 따로 법이 없다. 더구나 부처의 마음인 무심(無心)의 기준이 없는 수행풍토에서는 만법을 구족 할 수도 없거니와 중심(中心)을 잡는다는 것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바늘 찾기보다 더 막막할 노릇이다. 혼탁한 물에서는 닦을수록 심식(心識)은 더 어두워진다. 이런 사람들은 손발이 저리도록 목탁을 두들겨도 감도 잡히지 않는 부처공부 보다는 무위도식하는 신선이 훨씬 구미 당기는 메뉴로 여겨져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데 전념하게 된다.

석가세존의 해탈법(解脫法) 종지를 잃어버리고 오도된 곁가지에 매달려 빌어 구하는 무명천지에 제방의 질시와 음해를 무릅쓰고 선가(禪家)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소임도 업(業)이지만 함께 불도를 걷는 동업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으면 근본 법통을 회복시키려는 서원은 요원하기에 오류를 두들겨 부숴야 할 역할을 멈출 수 없다. 그 중에 신선놀음을 그리워하는 부처 문중의 문패를 떼지 않고서는 다함께 성불할 세상인 불국토(佛國土)는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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