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꼬리표
마음에 집착심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과 이생에 참 법을 깨달을 수 없는 축생과 미물, 몸 없이 윤회하는 영혼까지를 중생이라 이름한다. 중생은 탐·진·치·삼독에 본성이 가로막혀 보고 듣고도 알지 못하고 뜨거운 가슴이 없어 진실과 통하지 않는다. 천상을 수놓는 옥황상제와 저승을 주관하는 염라대왕도 당연히 중생이며 이 사바세상을 다 통치하는 정복자와 전륜성왕일지라도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면 그 역시 윤회(輪廻)할 중생이다.
사람의 인격은 평등하나 올바로 사유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역할은 천차만별이다. 소인의 삶과 대인의 삶은 노력에 의한 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다듬어진 이성은 육신을 제어하는 역량이 원활한 것이며 그렇지 못한 이성은 쉽게 상대에 휘말려 분별하고 그러므로 중심을 잡지 못해 지금 이 순간 찰나를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항상 활짝 깨어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그침이 없어야 한다. 그 기준은 허망한 속세의 가치관에 현혹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을 회복하는 것과 삼세(三世) 동안에도 망실 당하지 않을 불법(佛法)의 가르침만이 늘 깨어있을 수 있는 영약이 될 것이다.
흔히 도를 닦아 성품(性品)을 본다는 것은 이 몸이 무너지는 것에 상관없이 영원히 지닐 수 있는 부처의 지혜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세계를 똑바로 주시할 수 있는 바른 안목이 열려지는 것과 같다. 이처럼 성품을 회복하는 것은 곧 깨달음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진아(眞我)를 되찾는 것과 같다. 그러나 중생은 한번뿐인 고귀한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버린 태만한 사람이다. 항상하지 않는 바깥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 스스로 무명(無明)을 기르고, 불 확신과 고통인 번뇌와 동거하기 때문에 이생을 살아도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낳고 길러준 고귀한 몸뚱어리를 망상(妄想)의 집으로 대여해준 참으로 못난 인간이 중생이다.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망한 속세의 것들에 묶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허망한 것을 탐하는데 늘 바쁘고 의심이 그치지 않아 진실한 삶이 되지 못하고, 살고 죽는 도리를 깨칠 수 없어 잠시 지구를 거쳐간 나그네로 그치게 된다. 인간은 무한 우주시간을 점유한 완전한 소행성이다. 이처럼 소중하고 귀한 자신의 인생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생백년은 한낱 티끌이고 뜬구름 조각과 같을 것이다.
중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보고 듣고 맛보는 삶은 지혜의 힘을 키우는 선업(善業)보다는 반드시 갚아야 되는 채무와 같은 착업(着業)만 늘리는 인생이 된다. 오감(五感)은 중생과 똑 같되 이해와 뜻, 마음에 새김이 다른 부처의 삶을 본받고 다가서려는 용맹심으로 묵은 중생의 꼬리표를 떼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