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 복 그릇

 

<불교세계/2002.4月號, 풍경소리>

도(道)는 찰나에 딱딱 들어맞는 일상(日常)이다. 이처럼 깨달아 통(通)해지기 위한 석가세존의 법은 탐·진·치 삼독이 당면한 현실을 가로막아 천리 만리 멀어진 생각을 껴안고 살아가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해결하고 아울러 동업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 속에 담겨있다. 이 길이 최선의 인생이고 복(福)된 삶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여러 가지 존상(尊像)에 의지하여 공부를 지어 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업(業)에 가로막힌 인연은 불타의 가르침을 즉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갖가지 의인상에 의지하여 이치를 깨닫게 하고 실사구시 할 수 있도록 일러주고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으로 덕을 쌓아 해탈 성불하는 법은 구원이나 기도로 원(願)이 성취되지 않는다. 사람다운 노릇으로 지은 복(福)이 있어야만 온갖 상에 매달려 복을 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성불에 이를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갖가지 존상들은 복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보살행을 하는 것이 복밭을 일구는 것임을 일깨워 주는 방편이다.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백년을 염불해도 중생일 뿐이다. 중생은 대소에 상관없이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그야말로 죽은 시간에 파묻혀 지내는 시대의 낙오자인 셈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석가 부처님 법과는 동떨어진 절[卍]과 중[僧] 숭배자들은 진리와는 더욱 멀어져 보고 듣고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 닦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두껍고 어둡다.

마음공부는 지혜를 체득하는데 있다. 지혜경계는 복(福)에서 나오며 도(道)를 열어 가는 원천이지만 이타행인 헌신이 앞서지 않으면 지혜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제대로 된 사람노릇으로 마음의 지평을 넓히고 가없는 복밭을 조성하는 길이 이생까지 끌려온 육도 윤회를 그치고 일찍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첩경이라 할 것이다.

봄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기운이 충만하다. 늘 그래왔듯이 더불어 변화를 요구하는 중생의 기치가 도처에서 뻗쳐 나오기 마련인 것도 창가에 다다른 저 봄이 안겨주는 아이러니다. 엊그제 모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서울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직능단체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대표적인 불교사찰에 뛰어들었다가 해당 사찰의 요청으로 당국은 경내 법당에까지 들어가 시위자들을 연행하는 불상사가 빚어졌었다.

인연 없이는 원인도 생기지 않는다. 생존투쟁을 하다가 다급하여 부처님 도량에 뛰어든 사람들이 문밖으로 내쳐버려야 할 만큼 사악한 중 범죄자일 수 없다.
한낱 미물도 내 집 울타리 안으로 쫓겨 들어오면 밖으로 내치거나 박대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이고 천륜의 도리다. 더구나 종교는 사회제도의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기에 성역으로 인식하는 것이 오랜 불문율이다. 하물며 무소유 실천을 위하여 인륜을 저버리고 시주의 은덕으로 연명하는 출가자가 모여 사는 사찰에서 구원을 위하여 뛰어든 힘없는 민초들을 관청에 고하여 내치게 한 것은 중생구제로 지혜를 얻고 해탈 성불하기를 바라는 자들의 행실이기는커녕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음을 일깨워 준다.

근자 모 교단책임자가 권세에 빌붙어 일삼아 정치발언을 하는 흉측스런 화상이 매스컴에 자주 비추이더니 결국 산중기생 진면목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입증시켜 주고 있다. 백주 대로에서 목탁을 몽둥이 삼는 폭력은 어차피 삽살개 족보보다 더 못한 문중 일이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약자를 내쳐 명리를 구하겠다는 패거리가 불교라면 그 존재는 소멸되어져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더구나 잡동사니 엉터리 불교로 말미암아 무주처(無住處) 무주심(無住心)의 석가세존 정법을 예전에 말아먹은 인과로 보면 이미 늦었다.

옛 부처와 조사는 오늘날처럼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불교주의를 행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분소의(糞掃衣) 빙자로 황금비단으로 수 장삼하고 부처되는 공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인간을 풍문에서라도 전해들을 수 없다. 또한 출가를 빌미로 왜곡된 불교를 전파하는 하찮은 무리가 불문(佛門)에 창궐하도록 수수방관한 재가승의 업보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내 저승세계를 만행할 때 접한 바에 의하면 이생을 살 때 구도를 핑계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타인의 영혼을 농락한 산중기생들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 만큼 참혹하였다. 또한 터무니없는 절교 중교를 내세우느라 윤회를 끊고 해탈세계로 나아가는 출세간 법을 밝혀놓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임의로 훼손시킨 죄과는 그 업을 사할 약 처방전이 없었다.

무명(無明)은 자아(自我)와 현실사이를 멀리 두고 보는 어두운 식(識)이다. 생존에 매달려 보고 듣고 맛본 생각들을 놓지 못하는 무명보다는 부처·조사·보살을 껴안고 사는 구도(求道) 전문가들 의식이 더 소심하고 편협하여 분별이 그치지 않는 부조화 속에서 헤맨다. 그것은 죽은 관행에 묶여 초조(初祖)가 삭발하고 성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직시하지 못하는 질 낮은 수행 풍토로 말미암아 도 닦는 일상이 무명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의지하였으나 반드시 벗어나야 할 어린아이의 보행기와 같다. 하늘에 누가 우주를 창조했다고 빡빡 우기느라 이치를 통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처럼 인간불사(人間佛事)가 불교의 근본 종지임을 모르는 기복불교 역시 보행기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이다. 부처는 자연의 섭리를 요해한 마음의 소유자이듯 원래부터 있는 우주시간을 잠시 점유한 것이 인생임을 이해하면 만사형통이다. 그런데 죽자살자 보행기에 매달려 영혼을 내맡겨야 안심이 된다는 심약한 중생은 스스로 왕이 되는 불법은 당연히 못 알아듣고 이생에 사람으로 온 복(福)마저 다 까먹게 해달라고 열심히 빌어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깨달음은 복(福)의 화현(化現)이다. 복력(福力)이 미약하면 열심히 닦아도 해탈 인연과 지혜는 멀다. 지금처럼 좋은 시절에 태어나 한세상 사람으로 사는 것도 전생에 잘 지어놓은 복전(福田)이 있기 때문이지만 이생에 불법인연 만나 깨우치는 것 역시 사람다운 행을 한 복덕의 결과이다. 도(道)와 복(福)이 둘 아니듯이 모든 심신수행은 언제나 복(福)이 담겨질 수 있는 자동화된 빈 그릇을 준비하는 과정과 같다. 역천자(逆天者)로 박복해지고 탐욕으로 이것과 저것을 헤아리는 안타까운 분별이 없을 때 여한없는 복 그릇이 갖추어지고 그러므로 진정 쉬어지는 복락(福樂)의 이치를 피력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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