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깃발
<불교세계/2002.1月號, 풍경소리>
인생은 단 한번 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일생에서 참 삶의 가치관을 확립해야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지중한 과업이며 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깬 사람들은 모든 업(業)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불법(佛法) 이치를 깨우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이처럼 불법에 입각한 가치관을 정착시키려는 것은 내가 있다는 사상(四相)으로 세상을 재는 소아(小我)가 아닌, 아[我]라는 이 물건은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절이 깨닫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순간순간들이 이해되고 수용하는 일상(日常)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상은 시절 따라 잠시 모습이룬 인연화합물이다. 우리들은 깨닫지 못하면 영속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억지로 명상(名相)을 붙이고 그 허구에 주착(駐着)하여 벗어나기 어려운 인과를 쌓는다. 더구나 해탈세계를 옳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 몸을 비롯한 모든 형상은 잠시 모습을 이룬 환과 같은 것임을 이해할 수 없어 식(識)으로 받아들인 앞생각 뒷생각과 현재 생각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는 깨달음의 이치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즉, 만물이 마음 안에서 인연취산 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바람과 깃발"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능히 안다는 깃발에 속고 형상은 없으나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것이 바람이라는 것을 미리 꿰고 있는 알음알이로 찰나에 사는 참 나[我]를 망실한 채 죽은 시간의 잔재에 파묻혀 숨 쉬고 있다.
세상을 하나로 보지 못하는 단견은 양극단에 사로잡힌 비판의식을 키우고 입증이라는 과학의 힘으로 피폐된 정신시대를 유린한다. 어느덧 세모(歲暮)에 접어든 세상은 국, 내외에서 갖가지 이해관계와 풀지 못한 악연으로 서로 치고 받는 아수라판을 연출하고 있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최빈국 아프칸과 산을 뒤집는 첨단병기를 동원한 서방 연합세력과의 전쟁은 한 토막 픽션 같아 볼수록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가 하면, 나라 안 사정은 권세와 돈에 맛들인 목불인견의 탕아들이 권모술수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순리다. 옛 철인들은 속세계를 풍진(風塵)에 빗대어 덧없음을 노래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은 무상하건만 사람들은 작위로 세운 권세가 부질없는 것인 줄 잘 알면서도 그것들과
짝지어지기를 고대하며, 부귀가 허망한 줄 훤히 꿰면서도 탐욕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몰려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너무나 잘 알아 선택한 속세의 모든 가치관들은 내가 가지고 누린 것만큼
저편 어느 한 곳에는 반드시 상대적인 빈곤과 핍박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잔인한
모순을 잉태시킨다. 또한 모든 제도에 티끌만큼이라도 사(邪)가 개입되면 그것들이
부지불식간에 동업중생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 마구니의 도구로 화한다는
사실 앞에 내팽개쳐진 세태는 늘 위태롭기 그지없다.
구조가 복잡한 세상일수록 날마다 많고 많은 이유가 생겨나 세우고 부수고 외쳐 주장하는 모습들이 분분하기 마련이다. 파괴로서 재창조를 부추기고 소비하지 않으면 산업생산이 중단되는 이율배반적인 물질문명시대를 탓할 수는 없지만 이럴 때일수록 소욕지족(少欲知足)하며 섭리에 순응할 수 있는 심성을 갖춘 참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음을 잘 길러 단상(斷想)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지극한 객관이 된 선지식들이 첨단의 물질문명을 운용한다면 기껏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목숨 위에 다분히 의도적인 정의의 잣대를 올려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우치(愚癡)한 짓거리는 없을 것이다.
맹자는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의도덕(仁義道德)을 실천하는 왕도구현을 외쳤으나 아직 요원한 바램으로 남아있다. 잘 못 산목숨을 탄생의 경험이 있기 이전인 윤회의 극점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섭리를 그르치지 않는 심성을 길러 나날이 복잡해지는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됨 만이 유일무이한 왕도(王道)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누려도 줄거나 늘어나지 않는 불법(佛法)에 입각한 가치관의 세계이므로 만 중생이 더 많이 이루고 즐길수록 더욱 빛나고 밝은 세상을 만들기에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이러한 불법(佛法)은 무상도리(無常道理)이므로 식견(識見)이나 이해로서는 체득할 수 없다. 법신(法身)이 진리의 모태(母胎)임을 확연히 믿으려는 신심이 있어야만 허망한 것들에 휘둘리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진 회한(悔恨)이 일어나며, 그러므로 세상을 깨부술 듯한 분심(憤心)이 생겨나 차안(此岸)인 분별의 벽을 뛰어 넘어 영원한 자유의 길인 피안(彼岸)의 세계로 다가서는 용맹심이 생겨난다. 이때 비로소 가(可)하다.
비록 깨달음을 맛보았으나 사랑과 헌신이 빚어낸 자비원력이 없으면 상(像)은 있으나 통용되지 못한다. 근본불교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석존께서는 성도 후 저항하는 갖가지 외도무리들을 방편을 써서 제도하였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개인의 영화와 명리를 구할 뜻이 없어진 해탈자가 그러한 인고의 경험들로 초석을 놓지 않았다면 오늘날 가장 올바른 심성을 갖출 수 있는 종교논리로 발전된 불법(佛法)의 정체성은 확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각자가 할 수 없어 시대의 등불이 되어준 선업(善業)을 토대로 성립된 영원불변의 불교철학은 단 한번도 속세를 벗어난 적이 없다. 구경묘각(究竟妙覺)도 생각을 내려놓은 무심(無心) 뿐이기에 이생에서의 단절이나 이별이 없어 좋고, 무심 삼매로 익힌 선정(禪定)은 온 우주를 다 갖고 누려도 업(業)에 걸리거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아 쓸수록 더욱 좋은 삶의 묘약이다.
인연공덕이 도(道)를 성취시키듯이 세세간에 빛날 정법을 수호하려는 옹골찬 기질이 없으면 중도(中道)를 이룰 원력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여의고 임오년(壬午年) 새해를 맞이하는 이즈음에 어수선한 세상 창을 내다보면서 희비가 엇갈리는 심사를 토로한 것은 "바람과 깃발"에 걸리지 않을 혜안(慧眼)을 갖춘 인간불사(人間佛事) 원력 앞에 바늘 끝도 허락하지 않고 외길로 내달려온 모진 세월의 그림자가 길게 투영되기 때문이다.
만고에 기릴 불법(佛法)을 숭상하는데 있어 고(苦)는 강 건너 불인 줄 알았더니 도고마성(道高魔盛)이 바로 내 안에 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정법이 다한 이 무명천지에 牛谷의 실사구시(實事求是)가 확연할 때마다 온갖 음해와 풍상을 껴안은 아픈 세월이 앞길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이제 고진감래(苦盡甘來)하여 일찍이 시대를 계도할 선법(禪法)을 안착시킨 우리를 향하여 그 고난의 세월들이 미소 지으며 손짓하고 있다.
대도(大道)는 사물을 통해서 그 형체가 드러나듯이 무명(無明)의 등불로 삼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 필요치 않는 지극한 이치를 가혹한 흑백논리로 비추기도 하였다. 새해에는 지난 허물들은 모두 덮고 다함께 나누어도 과부족이 없는 불법세계에 우리 모두 거듭날 수 있기를 엎드려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