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으로부터 자유
인간의 본질은 오랜 윤회로 익힌 학습(學習)이 그 바탕이다. 더불어 깨닫지 못한 전생 신(神) 즉, 습인(習因)이 부모인연 지어 사대를 갖추고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무명(無明)에 갇힌 인간의 삶은 고등생명체에 상관없이 더 무거운 업(業)을 양산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악업(惡業)은 착업(着業)이 되어 지혜를 가로막는 벽이 되고 생사(生死)를 거듭하게 하며, 육도를 윤회하면서도 언제나 몸의 주인노릇을 한다. 업(業)은 보이거나 만져지지도 않지만 사유와 행동양식에 따라 얕고 깊은 뿌리를 내리며 천차만별의 인과를 낳는 에너지이자 물건이다.
이생에 부모인연 만나 이 몸을 결정하는 것도 다생을 살아온 이력이라 할 습인(習因)이 근본이다. 습(習)은 몸을 지배하는 의식(意識)의 중추기능으로서 오랜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에 노출되어 '나'라는 아상(我相)과 동거해 온 전역이 있다. 그러므로 어지간해서는 살며 집착의 인(因)을 남기지 않는 해탈열반으로의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다. 근본 불교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오래 묵은 습(習)이 지혜의 길을 가로막는 업(業)인 줄 알지 못해 해탈길이 멀다. 더구나 해탈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죽어 없어지는 몸에 상관없이 업식(業識)은 살았을 때의 습(習)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육도를 윤회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는 것이 말세중생이다.
착업(着業)은 무명(無明)의 본체로서 오랜 겁 동안 '나'라는 주관과 함께 길러지고 숙지되어 온 영혼이기에 스스로 자유스러운 해탈 법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 안의 극락을 가로막고 있는 숙업을 일시에 소멸하는 시절인연을 만난다면 그것은 여한 없는 대복인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은 속세의 대상과 가치에 의지해 길러지고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물들기 전의 본성(本性)을 회복할 동기를 맞이하기 어렵다. 혹 성품(性品)을 볼 수 있는 경계가 있어도 무심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는 해탈의 기회를 그냥 지나쳐 버리기 마련이다. 노력으로 성품을 볼 경계가 목전에 왔으나 의문을 깨트려 줄 선지식 인연이 없어 한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다시는 그런 경계를 맞이할 수 없다. 어렵게 느낌으로 체험한 것과 색다르게 안다는 것이 오히려 착이 되어 오래 묵은 심근(心根)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참선수행자들 중에는 종교 행위에 의지하지 아니하여도 뚜렷이 한 경계를 나타내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법회나 아니면 직접 무심 법을 전수할 때 전기에 감전되듯이 홀연히 치솟는 회한(悔恨)과 분심(忿心)에 갈팡질팡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사례들은 오늘날 牛谷의 禪法을 고증하고 펼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경계는 업(業)에 가로막혀있던 본성(本性)이 분기탱천하여 무명의 장막을 걷으려는 강렬한 몸부림이며 번뇌의 뿌리를 뽑으려는 용맹심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다 나은 다음 경계로 다가간다.
경계가 왔을 때 대상이 없는 곳으로부터 느껴지는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끓는 물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듯이 업습(業習)이 발동할 때는 몸의 여섯 구멍과 모공을 통하여 밖으로 내뿜는 냄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등한 동물의 체취는 물론 이 세상에서는 맡아 본적도 없는 역겨운 냄새를 피우면서 발광하는 모습은 육근(六根)에 의지한 전생 이력이 얼마나 추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게 한다. 숙업이 녹고 지혜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육식에 축적된 착업 종자가 기체로 발산되든 아니면 액체로 배출되어지든 반드시 몸에서 빠져 나오는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해탈지견이 열린다. 이러한 경계를 맞으면서 자성을 뒤덮고 있는 업의 실체를 직접 체감할 수 있으며 인간이 지닌 아집은 윤회하면서 길러진 묵은 훈습에너지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업(業)이 소멸되는 과정을 기능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별스런 종교행위와 높은 학문, 첨단 물질에 물든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방편으로는 영생의 길인 해탈법을 접목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팔만사천 교설로 업식을 녹이는 법을 설명하여도 인연이 먼 사람들에게는 낱낱이 일러줄 수 없어 牛谷의 해탈법을 광야에 소낙비 내리듯 인연 따라 성품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숙세의 업을 무너트리는 해탈경계는 크게 대근기·중근기·하근기
세단계로 나누어 설명된다.
첫째, 대근기는 태초에 빅뱅으로 오늘날의 우주질서가 형성되었듯 내면의 대 폭발을
통하여 일순간에 숙세의 업이 모두 소멸되어진다. 일시에 습기(濕氣)가 멸해진 마음은
전생과 이생의 기억이 없어 이해타산이 항상하는 속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삭막하기 이를 때 없는 하얀 가슴에 이해와 자비가 싹트는 오랜 시간까지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아질 뿐이다. 중생의 분별의식으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단절의 벽 속에서 순간순간을 지내온 인고의 힘이 바로 해탈의 본성인 무심(無心)이며,
물들지 않는 지혜로써 무명세계의 등불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중근기는 내면의 폭발로 업식을 멸하는 대근기와는 달리 전생의 공력과 이생의 선업으로 숙업을 기체화시키면서 의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경계를 맞이한다. 마치 자동화된 굴뚝의 연기처럼 착업을 발산하는 과정이 분명하고 열고 닫는 속도가 비교적 빠르다. 이것은 활화산처럼 분출과 평정의 과정을 거듭하면서 차츰 조화를 이루는 지구 역사와 동일하다. 인간은 자연의 피조물이고 의식 또한 살며 축적된 관습적 에너지이기에 동기만 부여하면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해탈을 맞이할 수 있다.
셋째, 하근기는 육근(六根)을 통한 업(業)의 분출이 약하고 그 경계가 희미하다. 무명의 벽이 두꺼워 느낌과 알아채는 근(根)과 식(識)이 아둔하고 어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심과 계율, 용맹심이 약하고 참 진리를 이해하는 식이 어두우며 사실을 직시하는 마음의 힘이 약하다. 근기가 낮다는 것은 잡식이 본성을 가린 결과로서 늘 하던 언어와 상, 코드가 맞지 않으면 그 밖의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하근기는 여러 모습의 존상에 빌고 경(經)에 의지하여 법(法)을 구하여도 진즉 불연(佛緣)은 멀어 닦고 길러야 할 과업이 첩첩이 산을 이룬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자성(自性)을 일깨우지 못한다.
수행과정에서 드러나는 경계는 넘지 못할 벽처럼 다가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경계만큼 업을 녹이고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다. 고(苦) 없는 낙(樂)이 없듯이 보다 분명한 경계로 습기가 분출되고 그와 비례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와 같이 역동적인 경계를 겪은 후부터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맞이하며 더불어 피부색이 밝아지고 나이에 상관없이 얼굴에 여드름이 생겨나는 등 생체변화는 물론 건강이 현저하게 좋아진다. 이 모두는 불법(佛法)의 실체(實體)로서 노력과 인연으로 일구어 낸 결과이듯이 수행에는 진실을 바로 깨닫는 선지식 인연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날 제방에는 불조의 근본인 불법을 바로 깨달아 실천하는 종교단체와 정신사표는 아직 풍문에도 전해들은 바 없다.
21세기 지금은 정법의 연이 멀어진 말법시대다. 석가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무지와 모순을 바로잡는 공부가 아닌 상(像)과 환(幻)을 앞세워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외도(外道) 마종(魔種)들이 활개를 치는 판국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만나기도 어렵다. 대다수 떼를 이룬 무리 속을 기웃거리다가 죽은 시간에 묶이거나 삼악도(三惡道)를 돌고 도느라 기약 없는 고통 속에 놓여지는 것도 애달고도 슬픈 일이다. 인연 없이는 중생을 즉시 건지는 정법을 지금의 말세 중생들이 알 수 없다. 대각은 무리지은 모습에 비례하지 않듯 해탈자의 표상인 범은 상대가 없다. 각성(覺性) 또한 이러하다.
성인과 범부 중생을 막론하고 업(業) 없는 인간은 없다. 내 안의 남의 것인 착업(着業)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불법(佛法)의 근본인 팔정도(八正道)를 거울로 삼아 실천하지 않으면 숙세의 묵은 업은 여하한 방법으로도 녹지 않는다. 이 법이 지혜의 문으로 들어서는 가장 지름길이고 업(業) 즉, 죽은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지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