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단상

 

계절은 사람의 마음까지 변화시키는 미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지난 밤 자시(子時) 동백섬 산책길을 걷던 나는 스산한 해풍이 해안 절벽을 후비는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흠칫 하였다. 아! 벌써, 계절의 끄트머리로 달려가는 이 가을에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오늘은 바다로 드리운 달 그림자에 내 삶의 일기장을 펼쳐본다.

牛谷禪院 부산지원을 열고 생활참선교실을 개설한 연고로 숨쉬기가 한결 편한 해운대를 주생활 무대로 삼은 지도 어언 한 달이 되어간다. 천혜의 장소에서 참선강좌로 공부를 회향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정진의 장이 펼쳐진 셈이다.

여기 해운대에서 牛谷禪院 법상을 펼칠 때는 늦여름 더위가 아직 성화를 부리던 초가을이었다. 불볕 더위를 삼키듯한 열정을 밑천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펼친 牛谷 생활참선교실 초기교육을 마무리하는 이즈음 선(禪)수행 동참자들의 공부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산선원을 개원한 후 마주친 불자들의 부처공부에 관한 건전한 상식은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였다. 자칭 불교의 메카라는 이곳의 구도열정은 변함없이 끓어 넘치고 있으나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이어주는 참 선법(禪法)의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조건이었다. 불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뜻 모르는 기복과 크고 작은 승려들과의 철저한 종속을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을뿐더러 머리에 뿔이라도 낼 듯한 외도(外道)를 쫓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군상들로서 터무니없는 것들에 불교라는 명상을 붙이고 환상을 신앙으로 여기는 수행자들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 시대 대다수 불교인들은 맹신적 종교 관행에 묶여 무엇이 올바른 마음공부인지 잘 알지 못하며 왜 고귀한 인생을 투자하여 불도를 걸으려 하는지 조차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牛谷禪院의 생활참선 법은 근원으로 인도하는 설법과 육신의 병통을 회복시켜 희망적인 삶을 안겨주는 갖가지 방편 등 실천적 수행을 구사하고 있다. 부산 牛谷禪院이 시대를 초월하여 석존 당시와 같은 파격적인 법력을 펼치는 것은 깨침의 종지가 망실된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곧바로 깨달아 가는 참선의 근본종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이시대 불교현실을 직관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잘못된 관행에 젖어온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대 자유에 이르는 근본법통인 선법을 펼친다는 것은 묵은 땅에 새로운 가치관의 씨앗을 심는 것이며 퇴락한 정신사를 개혁하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되어도 무방할 일이다. 지혜(智慧)가 반연(攀緣)으로부터 해방되어지는 순수의식임을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가 교단을 이루어 불도를 왜곡시키는 것은 시대적 불행이다. 근본 종지를 망각한 수행은 죽은 종교의식을 만들어 불자들을 옭아매는 것이 주업이며 이들과 아무 상관없는 부처와 보살을 빙자한 사(邪)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모 사찰은 일주일만에 화두타파를 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멀쩡한 사람들을 가정과 사회로부터 이격 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있다. 사회의 근본인 가정은 부차적인 수단으로 여기게 하는 간사스런 큰 보살과 엉터리 큰 중이 말하는 죽은 화두를 받기 위하여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만이 최상의 삶으로 여기는 수행풍토는 육신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피폐케 하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다. 참선공부에서 입 있는 자는 누구나 말하는 화두(話頭)는 중국에서 파생된 선 수행의 곁가지로서 잡식을 잠재우는 지극히 얕은 방편일 뿐인데도 만병통치약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치를 꿰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임을 올바로 깨쳐 아는 마음은 절대자라는 것이 헛것임을 꿰뚫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빌어 구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가르치는 자력신앙인 것이다. 牛谷의 선법(禪法)이 이곳 부산에서 체감하는 것은 대 다수 불자가 기복에 매달린 낮은 의식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집단적 고질병과 같은 기복을 일시에 초월할 수 있는 상지상책은 고단위 영양제를 무작위로 살포하여 기력을 증장시키는 특별한 체험과 석존의 원래 가르침이 무슨 타령이나 터무니없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순수성의 회복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데 牛谷 선법이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임금님 수라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내가 직접 먹지 못한다면 참 맛을 알 수 없듯이 정법이 처처에 너부러져 있어도 그 본뜻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통로가 열려있지 않으면 백년 인생을 마음 공부에 다 헌신하여도 그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방관자에 그치며 땀흘려 헛농사 짓는 농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에 올바른 선(禪)수행을 정착시키는 시대적 과업도 중요하지만 인연들에게 당면한 문제점들을 즉시 해결해 주므로 말미암아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더 넓은 본래의 불국토(佛國土)가 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더욱 화급한 실정이다. 그 힘은 외부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불씨를 발화시키는 적절한 동기부여와 인연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그 마음이 스스로 운명을 재 설정할 수 있는 힘이며 수행의 근본 종지임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무상한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지만 대 자연의 이치를 설파한 석존의 힘은 결코 줄어들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터무니없는 언구들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어두운 시대가 된 것은 근원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낮은 인간들이 환상이나 주장을 종교로 각색하여 유포시킨 원죄도 있지만 그러한 엉터리 잡설을 믿고 따르는 더 모자라는 인간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논리도 성립된다.

3천년 前 석가세존께서 펼치던 화엄세계를 21세기 지금에서 재현시킬 수 있는 정신철학은 유일무이하게 선법(禪法)이라는 사실을 제방에 입증시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근원에는 진리의 스승인 대자연의 힘을 순용(順用)하는 현묘(玄妙)한 이치를 익히 터득한 牛谷禪院의 역사가 있다. 이러한 牛谷의 힘은 만법(萬法)의 왕(王)으로서 자비(慈悲)와 이타(利他)의 삶이 항상 할 때 완성되어지는 것임을 만방에 고지할 것이 이 가을 나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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