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 일기

 

때는 바야흐로 꽃 피고 종달새 높이 나는 춘삼월이다. 어제같이 차갑게 느껴지던 눈 바람도 동녘에 어둠이 물러가듯 하룻밤 사이에 뇌리에서 멀어졌다.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잦고 매서운 추위가 한반도를 떠나지 않았다. 대 격변기를 맞아 어수선하게 여겨지는 사회현상들과 함께 겨우내 천기마저 난동하여 일상을 옭아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이처럼 예상치 않게 몰아쳐 생활조건을 가로막는 기상현상은 마음이 곤궁한 사람들을 더욱 막연한 단절감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충분조건이 되었다.

어둠이 짙으면 찬란한 아침이 다가옴을 예감케 되듯이 겨우내 민초의 삶을 휘둘렀던 강추위는 잘 여물은 봄을 우리에게 안겨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작용은 지극히 분명한 상대법(相對法)으로 엮이어져 있고 이치로 본 대 자연의 섭리 또한 가감이 없어 이 땅에 설정된 인간 조건들을 고(苦)의 저편인 낙(樂)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南으로 내려온 내 겨울의 끝 여행은 목적에 상관없이 지난밤은 막연한 설렘과 동숙케 하였다. 온몸을 전율시키는 봄 예감이 일더니 오후부터 해운대 길가에는 개나리가 꽃잎을 터트리고 목련이 바다를 향하여 하얀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불사(佛事) 노정에서 맞이한 청명한 하늘색에 화답이라도 하듯 화사한 열정의 봄이 사바세계에 충만하니 극락이 코끝에 매달려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 봄은 농부들에게는 김을 매고 빈 논에 물을 잡아 씨 뿌리면서 또 반드시 다가올 겨울을 대비한 가을을 기약하는 시절의 제전이 될 것이고, 나의 봄은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73개국 석, 박사과정 국비장학생들에게 부처님 사업인 참선(參禪)체험을 시켜야 하는 대임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 인재들을 초청하여 친한, 지한 인사를 양성시키는 국책사업 과제 중에 외국인 장학생들에게 한국의 선 불교를 체험시키는데 우리가 직접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도맡게 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초청 외국인 연수생들에게 우곡(牛谷)의 선(禪)을 체험 시킨다는 것은 한국의 선 불교를 세계의 지한 인사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참선(參禪)의 진면목인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체험시켜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튼튼한 육신과 평온한 정신을 가꿀 수 있는 禪적 삶의 지표를 세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티끌에 우주의 정보가 다 담겨있듯이 비록 짧은 선(禪) 수련이지만 우리가 지혜를 잘 모으면 이러한 선(禪) 수련 인연동기를 통하여 지금 우리눈앞에 펼쳐져 있는 퇴락한 불교현실을 단절시키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초석으로 삼을 수 있으며 중구난방인 제방의 선(禪) 수행 일기를 새롭게 구성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고귀하고 유한한 인생일지라도 미래의 꿈을 위하여 한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것이 선구자의 삶이듯이, 선가(禪家)의 법도가 낡은 흙담처럼 허물어져 내린 이 참담한 시대를 구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역사는 늘 깨어있는 참신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발 통문을 돌리고 인연있는 사부대중에게 다가가 불법(佛法)의 미래를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이해와 협조를 논의하는 일상이 어언 한달 여가 되어간다.

그것은 우리에게 선(禪)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일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부여해준 부처님 사업에 제방의 뜻 있는 자는 다함께 동참하여 무너져 내린 법도를 새롭게 건설해 나가자는 우리의 절실한 몸짓이며 아울러 지리멸렬해져 가는 불가(佛家)에 두루 공덕을 나누어 새 생명력을 부여해 보자는 무주상 보시의 원(願)이 담겨있다.

그러나 세속사는 호사다마(好事多魔)가 반드시 끼어들 듯 원대한 선의 기치를 내세울 절호의 전기가 도래한 국제적 인간불사(人間佛事)의 염원 앞에 불문(佛門)에 늘 상존하는 마장들이 날뛰어 숭고한 사명의식을 퇴색시키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비록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타락한 불가(佛家)의 구태의연한 실상들과 마주 칠 때면 선가(禪家)의 일기마저 내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마디로 내가 어이타 먹물 옷에 하열한 무리들의 틈바구니에서 살기를 발원하였으며 허상에 매달려 상식이 단절된 군상 속에서 선도(禪道)를 열어갈 것이라고 염원하였던가에 대한 회한이 물밀 듯이 엄습하는 지금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를 업 삼아 산중기생에 진배없는 처신을 일삼는 박복한 자들과 불법(佛法)을 이야기해야 되는 입지에 놓여 있는 내 화상(和尙)이 오늘처럼 구차스럽게 여겨질 때도 없었다. 동업중생으로써 벗어놓기 어려운 과업은 차제하고 사람의 근본마저 망실한 채로 부처를 앞세워 혹세무민을 꾀하는 무리들과 비슷한 사표의 반열에 놓여있는 입지를 되돌아보면 내 부처를 이루는 일은 차제하고 나의 조상님들을 욕되게 하는 어리석은 처사는 아닌지가 더 염려스러운 오늘 하루해는 참으로 길기만 하다.

인간불사에 동참을 권하기 위하여 찾아간 지방의 모 사찰 불교대학 강설내용은 온갖 불사(佛事) 이름을 붙여 우리 절을 크게 키우는 것이 불자들이 할 일이고 인생의 절대 복락을 누리는 일이라고 신들린 듯이 주절거리는 모습을 직접 목도하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종일관 절집 늘리고 가두행사 벌리는 돈타령으로 일관하는 이판의 애걸은 부처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도적무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부모 형제 인연마저 끊고 속세를 벗어나려 한 출가자가 무엇이 부족하여 구차스런 반연에 불과한 절 키우는 일에 저리도 집착하는가. 혹시 절집 공간이 부족해서 부처를 이루지 못한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내 아직 고금을 통틀어 대궐 같은 절집 기와지붕아래서 희희낙락 거리며 부처를 이루었다는 소식은 접해본 사실이 없다.

법회시간 내내 돈 이야기로 일관한 것을 상당법문이라 자화자찬하면서 박수를 유도하여 공동의 업인(業因)을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천박스런 절 장사꾼들을 어떻게 제도할 것인가. 아니면 사바세계 털가죽 걸친 중생이 모두 성불하고 난 뒤에 삭발중생이 성불을 할까말까할 그때까지 두 손을 놓아야 할 것인가.

불교와 부처, 사찰과 승이라는 고정된 등식에 다가간 불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이성이 현혹 당하게 되면 그날로 인생은 파장이다. 퇴락한 인성에서 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불교의 근본을 어떻게 깨달아 자기 부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첨단이 질주하는 현대사와 어떻게 보조를 맞추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자들이 오도된 불교사상과 무소유처를 잘못 새기게 되면 십중팔구는 색(色)이나 소리[音] 환(幻)으로 부처를 염(念)하는 열등아로 전락되어 자생력이 망실되며 그로 인하여 가정사가 어려워지거나 멍든 인생사를 연출하게 된다. 이러고서도 불교가 흥하고 부처님 법이 번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육근에 맛을 들이는 하근기 가르침에 빠져든 불자는 올바른 법을 만날 인연도 멀어지거니와 설사 반 강제로 인연을 지어주어도 그들은 엄연한 사실조차 왜곡하여 접수하거나 회피하기 일쑤다. 이 모든 과오가 부처를 빙자한 전문가 집단의 오류로 파생된 시대적 아픔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불법을 좀먹게 하는 고질병통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불법 대의는 더욱 퇴락 할 것이며 온갖 술수를 내세우는 사도가 세상을 더욱 어지럽히게 될 것이다.

인류유사 이래로 가장 합리적 철학체계인 불교를 공부하면서도 무소유처에 이르는 부처의 삶을 믿지 못하고, 그러므로 본질[法]을 깨쳐 알 수 없어 의인화 시켜놓은 경전의 가르침을 실상으로 착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온갖 형상과 방편 세우기를 수행상으로 삼고, 무위법의 이치를 올바로 알지 못하여 반드시 무너져 내릴 유위상에 의존하려는 저 나약한 자칭 스승이라는 자들에게 한 빛이 천년 어두움의 방을 밝히듯 영원불멸한 불법(佛法)이 가슴마다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소쩍새 우는 날에 한 토막 일상을 그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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