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불교세계/2001.6月號, 풍경소리>
불교는 깨달아 가장 자유스런 인성이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는 종교며 실천적 자비희사에 수행의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언구와 형상을 초월하여 더 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며 번뇌망상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피안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門)이기 때문이다.
참 사람이라 할 마음을 올곧게 다스리고 불교의 가르침을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육바라밀 행에 있어서는 인종과 종교, 이념과 사상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를 이루는 관문인 깨침은 한국의 백여개 각종 불교단체와도 무관하며, 승·속과 구차스런 수행경륜과도 아무 상관없다. 불교의 핵인 깨달음은 한 인간이 지어놓은 다겁생 간의 공력이 작동하여 긍정적 인식의 전환을 도모하는 극적인 순간 까지며 종교는 시절인연을 이어주는 역할이자 방편일 뿐이다.
천지만물 유·무정은 인연취산 과정이듯 수행자가 올바른 불법(佛法)인연을 만나 생사(生死)에서 벗어나는 것도 시절인연이 지어준 그만의 지중한 복력이기에 구도자들은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모색하며 때로는 공부를 나누고 배우는 대 법회를 마련하여 공력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초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 원래의 가르침은 야단법석을 통해서 극적인 인식의 전환점을 갖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토론 마당이 곧 법당이며 이치를 통달케 하는 교육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토론으로 이치를 통찰하는 수행관행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초조 입멸 후부터는 지혜가 수승한 선지식의 인생관과 불교철학에 의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법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불교현실은 암울함을 넘어 할 말을 잊을 정도로 퇴락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대다수 수행자는 불교를 접한 세월 길이만큼 아집과 독선을 길러 어두운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승단은 두발의 길이와 옷 모습에 따라 승·속으로 나누어 분별의 골을 파고, 출가자는 가당치도 않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불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직업으로 여기며, 죽은 의식인 환에 사로잡히는 것을 공부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1년 4월 27일자 모 일간지의 보도내용을 인용하면 우리 나라에서 세력이 가장 크다는 무슨 불교종단은 불법(佛法)의 원래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牛谷禪院을 시기하여 세계각처에서 온 인재들을 불교세계로 인도하는데 기여한 공적이 있고 시대와 국가에 공헌한 공직자[불보살이 따로 있지 않다]를 공박하여 사과를 받아 내었다고 떠벌리는 것은 불교인의 기본 소양은커녕 스스로 소인배임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인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더더구나 불법(佛法)을 널리 전파하고 체득케 하는데 기여해야 될 종단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로 저들의 대변지와 같은 불교언론을 내세워 가당치도 않는 무슨 종단협의회를 들먹거리며 세계에서 모인 석·박사과정 국비장학생들에게 참선체험 수련을 주선한 해당 공직자들을 모략 시비하여 걸고 넘어지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런 행위다. (2001년 5월 1일자 모 불교언론 사설)
인간사에서 필요악인 조직과 세력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위한 원래 종지에 충실할 때 존립의 의미가 있다. 더더구나 불교의 승단은 불문곡직하고 무주상 법을 체득하기 위한 임의 단체여야 하며 종지는 무소유처에 입각한 보살의 법도를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각 불교단체는 올바른 법통의 개발과 계승, 발전에 동참하고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표방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종지를 미진 만큼이라도 벗어난다면 세력의 대·소에 아무 상관없이 저들은 부처를 빙자한 하찮은 모리배 단체일 것이며, 맹신을 앞세운 사이비 집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牛谷禪院은 금번 4월 21일부터 양일간 충북 괴산 다보수련원에서 정부초청 외국인 국비장학생을 위한 참선체험 수련회를 봉행하였다. 내국인을 포함하여 백 수십명이 동참한 참선 법회는 전문 종교인들만의 모임이 아닌 세계각처의 불특정 다수의 인재를 위한 실천적 참선체험 수련으로서 한반도 불교역사 2천년을 통틀어 처음 있는 불교행사였다. 사안이 그러한 만큼 TV 3사를 포함하여 중앙 언론 대다수가 이번 선 수련회를 관심 깊게 지켜보았고 절대다수 언론매체는 목적에 잘 부합하는 참선 체험수련을 사실에 입각한 긍정적 보도를 해주었다.
한 국가의 대표성 있는 언론매체 모두가 깊은 관심을 보여준 본 참선 법회는 불법(佛法)의 덕목으로서, 제(諸) 보시이며, 육 바라밀 행이며, 실천적 보살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롯한 법력을 갖춘 승단(僧團)이라면 부처님 사업을 주관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소임도 여법하게 지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제방에 입증해 보인 셈이다. 이 시대 그 어떤 불교단체가 세계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을 내 몸처럼 돌보며 일사불란하게 선법(禪法)을 접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도량 내에서 메카를 향해 절하는 이슬람교도의 편의까지 제공해가며 각양각색의 대중을 하나로 이끌었다는 것은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다.
불교 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스런 인식의 소유자인 승(僧)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고경(古經)에 자신들의 심상을 비추어 훈육하고 수행하여 정진하는 단체가 승단(僧團)이다. 그것은 초조인 석가세존께서 탁발로 연명하면서 야단법석으로 해탈 세계를 열어 보인 무소유적 삶에서 기인하며 그후 달마와 혜능, 원효대사 등 수승한 선사의 독창적인 삶을 통하여 올바른 선법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牛谷禪院은 부처님 사업이자 일면 국가적 행사이기도 한 본 참선법회를 봉행함에 앞서 제방의 책임있는 불교단체나 언론에 본 사실을 충분히 고지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불교 관계인들은 법을 칭송하고 고양하려는 법기(法器)로서의 소양은커녕 얼토당토 않은 전통성 운운하며 실사(實事)를 시기 질투하고, 간교한 술수로 주제를 희롱하려 들었다.
한국 불교단체의 종통은 대다수 중국불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고 할 때 그들이 오매불망 전통이고 싶은 짝사랑의 이면은 초조인 석가세존의 법통은커녕 기껏 옛 중국 조계산 등의 수행풍조를 도입한 어쭙잖은 주제에 불과하다. 또, 진가의 보배처럼 여기는 화두는 육조이후 1200년대 중국의 한 승려가 출가자들의 잡 머리를 통제하기 위하여 개에게 뼈다귀를 물려 입을 막아 놓듯 던져준 사구일 뿐이다.
불법은 시공을 초월한 인연이 주제다. 실없는 자들이 만대에 걸쳐 전통을 껴안고 천천세를 불러도 그것은 중생놀음이다. 이처럼 서푼어치도 못 되는 마음의 양식을 위하여 존재하는 출가자들은 박복한 패거리 집단으로서 항상 잿밥에 눈이 멀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견성은커녕 오욕칠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까막눈이기 때문에 본체를 두고 서낭에 매달려 염불 기도하며, 이름마저 지워야 할 죽은 출가자 조상을 세워놓고 그 앞에 경배하는 말법시대 탤런트가 되는 것을 공부로 삼기 마련이다. 또, 불국토를 곡해한 무지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아방궁을 꾸미는 몽상에 젖어있으며 그 꿈은 당나귀 해가 도래하지 않으면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폐 일언하고, 불교는 내 안의 왕(王)이 되는 이치를 가르치는 수승한 철학이다. 그런데도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내가 불교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이 아수라판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야속스런 숙명에 묶여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