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 통과 체험기[Ⅱ]

 

중생의 명(命)을 재단하는 저승 명부전에서 찢어지는 고통과 경악스런 공포에 맞닥뜨리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무명업장이 원죄다. 이승 삶에서 무소유처 무소유심을 득하지 않으면 숙업을 소멸할 방법은 대우주 그 어디에도 없어 사생육도 저승형벌은 영원하다. 현대 지식인들이 영혼에 각인된 숙업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원인은 탐욕과 선악 시비분별, 교만과 아집, 게으름이 무소유에 이르는 각성(覺性)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해원상생의 자리이타 공덕을 쌓기는커녕 탐욕과 집착을 껴안고 맞이하는 저승은 육신과 정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수록된 탐착 인자를 낱낱이 뜯어 발기는 처절한 고통을 수반한다. 8만4천 경계로 점철된 저승세계 초입부터 으깨어지고 찢어지는 지옥형벌은 내가 죽으면 잘 보살펴 달라고 빌고 공들였던 지장보살과 절대자 그 누구도 없다.

저승 초입에서 찢어지는 공포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은 누구의 명이나 인도가 아니라 딱 그만큼의 업장에 상응하는 형벌을 치렀었기에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업이 전이된 것이다. 업의 전환점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자기 탓이고 지렁이 몸이라도 받는 것은 좁쌀 같은 전생 자비희사 보시공덕 덕분이다. 저승 명부전 초입에서의 형벌을 치른 영혼이 그 경계에서 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업장이 조금은 가벼워진 영혼으로의 진화이고 식(識)이 그만큼 밝아졌다는 뜻이다. 저승세계 여러 과정에서 천지사방이 단절된 막막함의 공포가 잠시 멈출 때면 마치 태산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였다. 속물중생은 세상을 다 주어도 탐착을 못 버린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만, 저승세계에서 잠시 주어지는 안식은 상대세계가 없는 비상(比相)경계로서 이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편안함이었다. 수천수만의 저승형벌 경계마다 잠깐씩의 고요가 주어지는 틈은 몸 있는 이승의 한 생으로서 이 근기에서 환생하면 마음에 새끼손가락 한 개도 안 들어갈 종교맹신자는 면한 인격체다. 이승 삶에서 해탈인연이 닿으면 지옥과 극락이 마음 밖이 아님을 알고 상과 비상, 비비상, 비상천, 비비상천과 무아(無我)를 요해하며 불교경전은 방편설이고 등장인물은 의인상임을 꿰뚫는다.

중생 마음은 늘 이해득실이나 시비분별이 꼼지락거려 진정한 자기자산인 고요와 맑음, 깊고 넓은 무한세계관을 수용하지 못한다. 특히 출가자가 청산에 기대여 살면서 세상잡사에 빠지고 속세를 그리워하면 무간지옥은 정해진 코스이듯 부질없는 정리와 부귀영화 잡기에 마음을 빼앗긴 재가자의 업 또한 이와 못지않다. 중생숙업은 참으로 질겨 약간의 고요가 주어질 때마다 면피할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렸던 것은 처절한 지옥형벌 와중에도 심층 업장은 쉬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였다.

해탈의 삶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중에 오매일여이듯 달리 편안한 고요를 취하면 마치 정(淨)같은 무기(無記)로써 정(定)과 선(善)같은 짓을 하는 외도사마가 된다. 만약 이 경계에서 잠시 맛보았던 달콤한 고요에 혹하여 이승으로 되돌아왔다면 천국과 영생, 부활 운운하며 타인의 영혼을 농락하는 신종교주가 되었을 것이다. 정법이 사라진 말세 불교도 그렇지만 구원종교 역시 무슨 천지 등의 종교사업체를 만들어 정치세력화를 꾀하며 혹세무민하는 교주들은 거의 고요 이전에 드러나는 환(幻)에 사로잡힌 근기다.

나는 사후세계 법도를 잘 알아서 고통과 정적이 교차하는 여러 저승경계를 넘은 것이 아니다. 파도처럼 연이어 들이닥치는 위 없을 공포와 고통 때문에 잠시 주어지는 편하고 고요한 틈새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 쫓겨났었다. 잠시 맛본 고요와 편안함은 천국과 지옥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무념무상이라 할 수 없듯 들끓던 화탕지옥이 그친 잠깐의 정적에서조차 머물지 못하였다. 불자들이 오매불망 염원하는 무념무상은 똑똑한 식견이 아니라 유·무위 일체법 만행과 자비희사 공덕이 쌓여야만 비로소 가(可)한 해탈법칙을 증명하듯 저승세계 인과철칙은 공고하였다. 중생은 자기라고 믿고 의지하는 오온(五蘊)에 물든 훈습에서 놓여난 체험이 없어 참 자아 영역인 맑고 고요한 경지를 두려워한다. 살아서 미리 지옥고를 치루는 참선공부자들도 호흡과 소리, 빛과 마음조율로 오온(五蘊)에 속지 않는 좌선수행을 하지만 선정과 무기경계에서 헤매는 것은 숙업을 소멸시킬 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사생육도 일체중생은 누구나 서원할 수밖에 없는 정(淨)에 머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난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에 안착할 수 없었다. 열반적정의 이치를 잘 알아서가 아닌데도 고요에 동화되지 않는 내 자아는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담금질이 필요한 인간불사 프로그램이 아직 가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승을 살 때 어설픈 구도행위로 고요가 무심지혜의 원천임을 알고 탐착하였던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때 주어진 편안하고 고요한 정적(靜寂)에 기대었을 것이다.

생사를 면한 고요에도 머물지 못하는 저승 나그네가 되었던 것은 03시까지의 혹독한 담금질로 모든 욕망도 의지도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작용은 더욱 또렷해져 머리 위 문갑의 깜박이는 전자시계를 응시하다가 홀연히 드러난 경지는 일체중생이 염원하는 천국 바로 그 낙원이었다. 공포와 고통이 사라진 편안함과 사방천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낙원은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하는 경탄이 솟구쳤으나 감정이 발동되지 않았다. 지금껏 거쳐온 저승세계의 처절하고 절박한 고통을 겪느라 영혼의 자산을 몽땅 털린 빈털터리 주제에 목전에 펼쳐진 아름다움과 평온함이 충만한 천국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도 하였건만 내 영혼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낙원을 수용할 뜻이 전혀 없었다. 생사윤회를 수없이 반복하며 선업으로 교환해야 될 숙업을 한꺼번에 몰아서 소멸하고 천상에 입성하였기에 그즈음에서 주어진 천국에 정착할 수도 있을 법한데 무슨 강단인지 내 영혼의 주인공은 그게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아름답고 편안한 천국조차 접수할 뜻이 없자 또다시 경악스런 공포가 덮쳐 마냥 아름답던 천국으로부터 퇴출당하였다.

나의 저승 여정은 영생불멸의 극락세상도 잠시 쉬어 가는 간이정거장에 불과하였다. 이때 티끌만큼이라도 주어진 천국에 혹한 기상으로 이 사바세상에 회귀하였다면 일체중생의 염원과 코드가 맞아 분명 새로운 정신계의 시조가 되었을 것이다. 한 생각만 일으키면 만 중생이 추앙할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었음에도 주어진 천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불타의 해탈법이 사라진 이 무명시대 정법의 이정표를 세워야 할 시대적 소임 때문일 것이다.

이날까지 불교의 최고경지 무소유 정신 같은 것은 들은 바도 없는데 천국을 선명하게 인식하면서도 일말의 욕구가 없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아름답고 고요하던 천국이 입체화가 되면서 내 영혼의 주인공은 그 낙원의 천진난만한 동자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천상의 동자가 되기 이전까지는 주체적 인식과 일체의 존재성이 없었지만, 이 낙원에서는 순진무구한 동자 모습으로 자다 놀다하며 이승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심신에너지를 축적하며 성장하는 과정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이승과 저승을 단 생에 경험한 내 인식세계에서 가장 편하고 청순한 느낌은 천상의 동자였던 바로 이 장면이다. 난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삼라만상 생사 이치를 집대성한 선시(禪詩)를 현장 일기처럼 쓰게된 밑바탕은 이때의 순수한 동자기상이 감성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8만4천 저승세계를 단번에 뛰어넘어 청정무구해진 내 심신은 수년 동안 이해관계가 분분한 현실사회의 역겨움과 삭막함으로 피눈물을 자아내었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수백 수천의 윤회과정을 생략한 이 몸 그대로의 환생이었던 불(佛)세계 인간불사는 천신만고로 개오(開悟)가 되었으나 육신에 깃든 습기를 말리는 오랜 보임을 요구하였고 한 번의 들숨과 날숨 간격이 억겁만리 생지옥이었다.

본론으로 돌아와 천상의 동자는 고뇌가 없고 한없이 청순하기에 일체중생이 꿈꾸는 이상향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주어진 천국에 동화되지 않자 동자 모습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새롭게 드러난 세계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천국이었다. 이곳은 천국 그 이상의 비상천계로서 앞서 천국은 고통이 들끓는 지옥형벌 끝에서 마주친 상대적인 천국이었지만 지금의 천국은 누군가 진수성찬을 가져다 바치듯 훌쩍 내 앞에 차려졌었다. 두 번째 맞이한 이 천국은 온갖 종류의 화초와 그윽한 향기 칠보로 빛나는 상상 그 이상의 세계였다. 사방팔방이 아름답고 무진보배로 장엄된 이 천국은 시간과 공간개념도 없어 묘사조차 불가능한 한량없는 세계였기에 무엇을 원하거나 소유할 필요도 없는 그냥 맘껏 누리면 되는 저절로 세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존재의 절반 보이지 않는 세계 무위법계의 여러 장면과 시사점이 명확히 드러나고 오감이 아련하게 되살아났지만, 한량없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천국을 누리고 싶은 의지가 발동하지 않았다. 천상은 놀고 지내는 일상뿐이라서 깨달을 수 없다는 심오한 불교교리 같은 것은 들은 바도 없는데 소가 닭 쳐다보듯 위 없는 천상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기미조차 없었던 것은 무소유를 실증해야 될 불세계의 인간불사프로그램 때문일 것이다.

무위법계에서의 무소유실천이 현실에서 구현되었던 사례 한 토막을 언급하면 95년 입전수수 후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단시일에 신화같이 국·내외의 특수사업권을 확보하여 장안이 떠들썩하였지만 단 한 푼도 사익으로 전환하지 않았던 것은 능히 하지 못할 것이 없는 해탈법도의 무상심심미묘법의 실증이었다. 불교 수행의 정점 무심은 유·무위 법계 모든 가치를 능히 꿰뚫고 초월한 힘이기에 때론 쓰고 거두어도 아무런 걸림이 없다. 무역회사를 만들기 전부터 사자암 보살님은 내가 나라 절반을 가질 거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난 권세와 재화에는 흥미가 없었다. 각설하고 사후세계 끝자락에 도달한 즈음 나에게 바쳤던 천상에서 딱 한마음만 일으키면 절대 권세를 누리는 전륜성왕으로 이 사바세상을 재단할 수 있는 것은 현 74억 인류의 정신에너지 총량이 0.1그램도 안되기 때문이다. - 3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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