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鳳凰)의 나래를 펴라.
<불교세계/2001.1月號, 풍경소리>
한 백년의 인생길이 무한한 우주에서 피조된 생명체임을 자각한다면 우리 인간의 삶은 결코 길다고 할 것이 없다. 삶을 인식하는 기민한 요소인 이 몸의 사대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생명을 의탁하는 천지사방 만물이 무엇하나 제 모습으로 영원하지 않은 것임을 잘 모르고 유위에 묶여 살아온 인생 살이는 그 끝이 어디에 닿든 올바른 삶일 수 없다.
무한한 우주를 일시적으로 토막 내어 점유한 인간의 길에서 영원히 사는 길은 결국 영원성이 없는 유위법에 속은 것으로부터의 단호한 반전이며 미혹에서 벗어난 자아가 되는 길 뿐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양태는 필요욕구 충족으로서 만이 그 생명력을 온전히 유지해 갈 수 있듯이 地 水 火 風 사대에 의존한 마음이 박약하고서는 결코 깨달음에 도달될 수 없다.
인간사에서 무한 자산을 확보한 뒤의 안위와
고(苦)를 낳는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한량없는 마음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참으로 소유함을 알 때
비로소 무소유처에 이른 평정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 길은 피안의 땅에 안착하는
첩경이기에 오직 깨쳐야 만이 가 닿을 수 있다.
깨달음은 우주가 원래 자기의
자산이었음을 분명히 확인하는 절차와 같다. 중생은 삼라만상이 자아와 일체동근(一切同根)임을
재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착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절인연으로 가는 길은
결국 만상이 원래 자기 것임을 재확인시키는 관행적 절차다. 탐, 진, 치 삼독에 물든
마음이 부처의 관인을 받게 되면 비로소 헐떡이는 마음을 내려놓고 평정의 길로 접어든다.
영생자인 부처는 영원성이 없는 형상과 허깨비
같은 환(幻)의 경계에 묶여 남의 자산을 헤아리는 어리석음에서 탈피하여 온 우주를
자기자산으로 등기를 해둔 대 부호다. 그는 이 생명이 다하여도 자신의 소유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절대확신이 있기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분별에 묶이는 중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며 내 밖의 또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대 부호가 되려면 인간일 때 오로지 깨쳐야 할 일 뿐이다.
그 길은 시공에 묶임을 당하지 않는 대 스승의 길을 답습해야만 할 것이기에 인간사에서
깨달음은 더욱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인간 몸 가지고 있을 때 집착심을 놓고 이
세상을 다 내 것으로 만들어도 과부족이 없을 대인의 길을 걷지 않으면 다음은 결코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한 나래에 구만리를 자재하는 봉황의 날개를 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백년 인생에 영원한 우주를 다 헤아려 자기자산으로 등기해 놓을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섭렵하여 의심을 다 내려놓으려면 육근에 깃든 맛을
놓고 시공에 걸림 없는 봉황의 기상을 갖추어야 한다. 육근 경계의 의문사항인 무슨
절대자나 그로 인한 언어의 현시에 끄달림 당하면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낭비한 결과를 가져와 삼계를 자재할 봉황의 날개를 키울 여력이 없다.
인간으로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임의로 망실하는 것은 스스로 잘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본인의 과오일 수도 있지만 근자 개방된 첨단의 이기를 통하여 세상에 흘러 넘치는 허황한 주장들이 중생에게 봉황의 날개를 쉽사리 달지 못하게 하는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 그 비근한 예로 하늘에 누구의 아들을 맹신하는 절대미신 집단과 또, 무슨 신(神)을 앞세워 혹세 우민화를 도모하는 자생 도사무리, 인도와 서양에서 직수입된 별 해괴한 수행기법 등이 있다. 이들이 노닥거리는 짓거리는 봉황은 고사하고 햇살이 비치면 그 존재마저 소멸될 이슬 같은 인간 되기를 염원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무슨 신(神)의 알짜종놈 되지 못해 안달복달한다.
인간의 사고가 어느 한 곳에 묶임을 당하고서는 우주를 다 섭렵한 대인이 될 수 없다. 더더구나 무슨 절대자나 신(神)이라는 개념에서 해방되지 않은 봉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화되고 의인화된 신(神)은 그 요사스런 명사에 아무 상관없이 몸 없는 중생이며 그 인(因)은 전생에 깨닫지 못한 훈습의 찌꺼기임을 인지하는 것이 인간에게 그리도 어려운 과제인가. 요즘 월남에서 온 자칭 무상사[부처의 호칭]라는 여인은 서울강남 어디에서 신(神)을 직접 체험하라고 전국 방방곡곡에 외쳐대고 있다. 초록은 동색이듯이 또 어떤 선생이라는 자는 한 맺힌 여인의 접신 공작에 부화뇌동하여 그를 찬양하는 글을 띄우고 있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을 불러들여 새끼무당을 만들기 위한 집단 공수 푸닥거리에 흔쾌히 협력한다는 것이다. 흑과 백을 분명히 알지 못해 한민족의 혼을 오염시키는 짓거리를 찬동하는 이 시대의 스승이라는 작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하다가 온 찌꺼기란 말인가. 웬만큼 굳은 마음이 아니면 이처럼 혼란스러운 정신사조에 정진은 고사하고 그 자리에서 초연해 지는 것마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듯 눈앞에 벌어진 혼돈은 미래를 창조할 기미다.
사람은 누구나 봉황의 날개를 사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 아닌 너와 이웃, 인류사회를 위하는 생각을 일으켰던 그 마음의 힘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심이며 봉황의 마음씨앗이다. 이제 의심과 두려움, 분별에서 벗어나 그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자. 삼계(欲界 色界 無色界)를 뛰어넘어 자유자재하는 봉황의 세계에는 生·死, 有·無가 확연하며 黑과 白이 분명함을 깨쳐 아는 그 마음뿐이기에 잘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오래 전에 탐욕심에 사로잡힌 소아(小我)가 아닌 걸림없는 봉황의 비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