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心 三昧

 

불교인은 누구나 위없는 깨달음을 소망한다.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이생에 열반에 들어 생사윤회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 몸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우리는 불연(佛緣)이 닿은 지금에 불문곡직하고 깨쳐야 한다. 가장 분명한 깨우침은 해탈법의 시조(始祖)인 석가부처님의 삶과 인생을 통하여 관점을 나란히 하는 것이 정도이고 최선의 방편일 것이다.

3천년을 변함없이 이어오는 석가세존의 유산이래야 지니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빈 마음, 무심뿐이지만 참 무심법(無心法) 만나기는 맹구부목(盲龜浮木)만큼 어렵다. 또한 무심은 빌거나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절인연이 죽음보다 더한 인고로써 8만4천 경계를 겪게 하고 바늘 끝도 허락지 않는 단절의 벽 속에서 정도(正道)를 걸을 참 사람을 재탄생시킨다. 이처럼 진정한 깨우침 즉, 무심지혜는 죽음과 같은 심신의 고요에서 나온다. 더구나 무심자(無心者) 인연이 닿지 않는 깨우침은 태산을 옮기는 것 보다 더 어렵고, 무소유는 범보다 더 무서운데 수천 수억의 현대인들이 무심을 위하여 안달복달하는 것은 왜일까.

무심은 만법(萬法)을 꿰뚫는 지혜(智慧)의 근본이며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마음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또한 끝없이 연기하는 존재를 직관하는 힘이며, 생사를 벗어나 영생을 얻는 유일무이한 법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대로 구성된 이 몸도 잠시 빌려온 것이고 나[我]라고 믿고 의지하는 오온(五蘊)도 반드시 허물어진다. 모두 변하는 것뿐인 이 속세계에서 단 하나 물들지 않는 자성의 회복, 열반의 삶은 분명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이며 행복이다. 그러나 무심 지혜의 등불을 지킬 의무가 있는 가문은 빛바랜 세월의 길이만큼 삭아버렸고 해탈법의 종지는 아득하다. 가장 원대한 진리를 담은 불교가 길흉화복을 헤아리는 질 낮은 종교로 각색되어 식자들에게는 외면당하며 노인과 여자전용 종교처럼 비추이고 있다. 도는 세간을 떠나 달리 있지 않다. 출가를 직업으로 삼으면 시정잡배보다 더한 속물이고 마음 밖에서 구하는 외도, 사도를 정도라 우기며 하열한 근기를 끌어 모아 세력을 키우는 것을 수도로 삼는다. 이런 불교시대가 말세이며 바로 지금이다.

인간사는 생사유전하며 오고가지만 다행히 불조(佛祖)의 법은 심법(心法)이며 무상(無相)이기에 풍진세월의 소용돌이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사바세계에 불법(佛法)만큼 당연하고 쉬운 것이 또 어디 있는가. 천지만물이 불(佛)아닌 것이 없고, 쉼 없이 연기하는 자연의 섭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이치가 곧 법(法)이다. 가로막힌 상(相)만 거두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운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나 대부분 과거의 잘 못된 훈습과 탐욕, 이내 맞이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걸림이 되어 진리를 깨닫는데 머뭇거리고 퇴행은 잽싸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너나없이 들숨날숨 간이고 인생은 주어진 순간의 영속까지다. 삶에서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변방이고 방편이다.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마음밖에 따로 세우지만 않으면 일체가 진실이며 삼매인데도 변방을 헤아리느라 무심 지혜가 멀다. 대각(大覺)을 하는 가장 확실한 비법은 이 몸으로 육도만행을 완료하는 것이지만 독각자(獨覺者)가 아니면 불가하다. 만행 중에 사후세계의 여러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업(業)의 근거를 한 번에 다 알아 그대로 도통(道通)인데 조금씩 선정(禪定)에 들락거리느라 부처공부가 수고롭다. 해탈지견(解脫智見)은 거두절미하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사자(死者)와 같은 심신파장을 갖춘 사람의 식견(識見)이며 마음의 작용이다.

백년도 못사는 범부와 성현이 불꽃보다 더 영롱한 불법(佛法)을 어쩌랴만 크고 작은 용렬한 도인들이 석존의 가르침을 왜곡, 전변시킨 업으로 오늘날의 불도는 암흑지대다. 더구나 말과 문자 이전인 선법은 해탈인연으로 혜(慧)가 드러나는 묘법(妙法)이기에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은 적자(適者)가 없으면 당연히 지리멸렬이다. 이즈음 산문 밖은 볼수록 어지럽다. 겨우 고대 인도문자나 중국식 불교용어를 뒤적거리고 얼토당토않은 종교의식을 만들어 몸과 마음이 더 수고로워 지는 것을 부처공부로 삼는 판국이니 승속을 불문하고 닦을수록 더 어두워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오죽하였으면 서기 8백년대의 임제선사가 다섯가지 무간죄를 지어야 해탈 성불한다고 하였을까.

깨달음을 얻는데는 고매한 학식과 영악한 꾀보다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헌신으로 쌓은 덕(德)이 훨씬 앞선다. 지금 제방에는 별별 도인과 도법이 지천이지만 거의 이 구멍에서 나와 저 구멍으로 들어가느라 소란스런 근기들이다. 종교 문자와 환, 기복에 묶인 구도는 낱낱이 토막이고 세월을 덧보탤수록 벽이 되어 깨침은 고사하고 제 몸뚱어리조차 건사 못한 전문종교쟁이에 불과하다. 자기중생도 제도 못한 인간이 누구를 깨우치게 하겠는가. 돈오(頓悟)는 자비공덕의 결과로 나타나는 체험의 세계이며, 헌신의 터전에 심어지는 무심 씨앗이기에 달리 앞세우거나 따름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무심지혜는 무주상보시행에서 생겨나며 마음을 쓰고 거두어도 아니한 듯할때 금강지혜가 나온다.

난세에 영웅호걸이 생겨나듯이 대각자(大覺者) 또한 외도, 사도가 판치는 난법시대의 요청에 따라 이 세상에 나타난다. 각(覺)은 전생과 이생에 쌓은 공덕의 결실이지만 만법(萬法)을 제 접한 원력이 없다면 그의 무심(無心)도 말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무기(無記)다. 부처도 중생에 반한 이름이듯이 모든 존재는 상대로 인하여 드러나는 상(相)이다. 유와 무가 그러하고, 흑과 백이 그러하며, 선과 악이 또한 그렇듯이 무심 지혜 역시 중생을 위한 헌신에 비례하여 생겨나는 힘이며 사바세계를 밝히는 고상한 빛이다.

세상은 점점 다양해지고 추구할 대상은 나날이 늘어간다. 열린 정보화시대로 개인의 지식과 경험조차 독점될 수 없다. 보편화의 물결 속에서 부닥치는 대상 모두를 수렴하되 묶이지 않는 이치를 터득하지 않는다면 삶은 멍에이고 내일은 꿈이 아니라 두려운 질곡이다. 그러나 무심은 어디서나 쓰고 거두는데 부대낌이 없어 늘 편안하고 쓸수록 신뢰와 효과를 더한다. 이처럼 무심을 빚는 올바른 참 선법(禪法)은 세상을 경영하는 비법이며 무궁무진한 힘이다. 비록 불조(佛祖)의 법향은 난세에 묻혀있지만 몇 올바른 사람이 있어 세상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삼세(三世)에 묶이지 않는 무심삼매(無心三昧)의 묘(妙)와 원대한 효과를 서술하였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