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과 생이지지(生而知之)
인간을 비롯하여 태(胎)로 태어나는 일체중생은 모두 부모인연이 있다. 태. 난. 습. 화 4생의 탄생 경로 중에 태로 태어난 생물은 유난히 부모의 끈끈한 보살핌을 받는다. 특히 인간은 독립성이 강한 고등동물이지만 자식에 대한 집착은 끝이 없다. 자신이 자식을 잉태했다는 소유의식과 오랜 양육기간의 정리가 더해지고 자식이 미래의 자기라고 여기는 요상한 인식이 일반화된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전생업과 대로 부모인연 만나 몸을 바꾸어 가며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존재들이다. 같은 부모 자식이라도 성품이 똑같지 않은 것은 개체의 주인공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전생에도 당연히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믿음은 무지의 소치다. 이기적이고 간교하며 탐욕에 찌든 전생훈습을 제어 못하는 금수나 아수라가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배신을 능사로 삼는 천제(闡提)가 지천이다. 전생 습인의 특질에 상관없이 이생에 몸을 받았다는 것은 영혼, 즉 신(神)이 부모인연을 지어 여하히 삼위일체를 이룬 결과다.
영혼이 생명력 깃든 인간의 몸을 가지면 독립적 정신체계인 자아가 형성된 인격체가 되지만 정신의 본가인 영혼은 부모가 의도적으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인연 사이클이 맞는 부모의 빛 에너지 파장을 쫓아 딱 그 시점에 몸을 받아야 할 영혼이 생식세포에 뛰어든 것이다. 부모는 최상의 탄생기반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작위로 영혼을 불러들이지는 못한다. 몸을 기반으로 정신이 되기 이전인 영혼은 무위법계의 인연상관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취사선택은 불가능하다. 또한 영혼은 비 물질계의 업 인자이기에 시공간의 저촉도 받지 않는다.
모든 영혼은 전생에 무여열반에 들지 못한 몸 없는 존재였지만 이생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 몸을 받게 된 것은 전생 한줄기 선근으로 해탈성불의 기회를 부여받은 셈이다. 다양한 지구 생물체 중에 인간숫자는 극히 미미하듯이 전생에 인간으로 살았던 영혼이 다시 인간 몸을 받았다는 것은 무량대복이다. 축생이나 미물의 몸을 받았다면 애당초 성불은 글렀다. 축생에게 해탈진리는 우이독경인데 무슨 지혜의 힘으로 생사분별에서 벗어나겠는가?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 사바세상이 전생 특성대로만 살 수없는 시스템인 것은 이 지구별이 운명의 재창조 터전이기 때문이다. 다음 생에 좋은 국토,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인연 만나기를 서원하는 불자들의 겸허한 마음의 여백은 초과학적인 인연과보와 윤회전생의 속성을 파악한 슬기로움이다.
모든 유, 무정의 업이 천차만별인 것은 전생 숙업에 기인한다. 불연을 만났어도 단박에 생사윤회고(生死輪廻苦)를 끊지 못하는 것은 심층의식에 미세한 삼독심의 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성하여 유여열반에 들었더라도 완전한 열반경지인 무여열반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이생 인연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열반적정을 유지 못하면 또다시 저승세계를 한 바퀴 돌아와야 한다.
생이지지, 즉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자질을 이야기하려니 윤회전생을 길게 설명하게 되었다. 우리가 생이지지를 기반으로 일찍이 해오하면 여한이 없으련만 인간 몸 받는 것 자체가 전생 빚 갚고 지혜공덕 쌓으라는 명부전의 뜻이었기에 불연(佛緣)없이는 언감생심이다. 대다수 생이지지는 심층의식인 제8 아뢰야식에 침잠되어 있어 하근기는 가늠조차 안 된다. 전생에 보고, 듣고, 맛본 것에 탐착된 습인이 표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자아 역할을 하기에 선천지혜인 생이지지를 의지로 이끌어 내어 단박에 숙명을 바꾸는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무척 어렵다.
전생식견이 이생까지 오롯이 이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저승 관문에서 작열하듯 경험하는 극한의 공포로 기억인자가 거의 망실되고 태어날 때의 첫 날숨에 생사가 갈리는 절박한 고통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앎이 거의 소멸되기 때문이다. 참 진리를 기반으로 생사경계를 들락거려 본 어지간한 선근이 아니면 생이지지는 기대 난망이고 일부 선근이 남아 있어도 이생의 중생훈습이 심층의식을 덮고 있어 백척간두 진일보의 삶이 아니면 전생지혜는 발현되지 못한다.
요즘 신동소리를 듣는 연예인들이 더러 있다. 전생에 잘 하던걸 망실하지 않고 태어났기에 이생에 노력이나 지식이 별로 없어도 그 분야에서 출중한 자질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전생에 별 고뇌 없이 살며 풍악에 올인된 습인이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잘 만나 다시 태어난 지복도 있지만 보너스를 받은 인생들이라 해도 될 것이다.
한 세대 전만하여도 할아버지 선행이 손자 밑거름이라 하였지만 지금은 윤회가 빨라 당대에 과보가 드러난다. 자신이 짓고 자신이 직접 받는 초스피드 시대다. 전생의 선근인 생이지지도 빠른 윤회시대로 말미암아 그 효력이 곧바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문화차이가 크지 않는 시차를 두고 다시 몸을 받았기에 생이지지가 뚜렷한 신동으로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백년천년 후의 예능분야 선호도가 지금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생이지지를 하필 풍악으로 비유한 것은 그쪽 성향이 눈에 잘 띄는 대중성 때문이다.
무념무상은 정신세계의 완성이기에 분별상이 있는 사바중생들이 가늠되는 인격체가 아니다. 참 진리를 증득한 무심도인이 연예계 스타처럼 하루아침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면 그는 빈약한 시대정신의 군상과 코드가 맞는 영혼 없는 허깨비 인간이거나 신(神)을 주인으로 섬기는 비천한 종교 교주다. 저 하늘에 있다는 이스라엘 아버지나 죽어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 아들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원종교의 시조로 등장한 인간은 척박한 시대의 토속인물로서 환(幻)을 절대자로 형상화하고 신봉하였던 독소적이고 가련한 생이지지 소유자였다. 이들이 지금 같은 첨단과학문명시대에 터무니없는 메시아나 구원자, 대속자로 추앙받는 아이러니는 영혼이 박약한 속물중생들의 셈법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생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해탈성불로 다시는 고통스런 윤회전생을 하지 않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전생 선근의 결정체인 생이지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오매일여로 내 안에 내재된 생이지지를 이끌어 내어 해탈지혜의 꽃을 피우고 무여열반의 결실을 맺자고 이 글을 남긴다. 만물의 영장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맛본 것에 집착하는 탐욕중생이 내생에 인간 몸 받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 나가기 보다 더 어렵고 참 불법(佛法)만나기는 맹구부목(盲龜浮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