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축산 종정과 법봉
우리 격언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이 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처신하라는 뜻일 게다. 이 글은 95년 승가의 하안거가 끝나는 날 영축산 통ㅇ사 월ㅇ종정스님과 얽힌 사연이다. 초기 나와 만행을 자주 다녔던 청룡암 중이 날이 어둑한 시간에 곧 죽을상이 되어 창원 내 자택으로 찾아들었다. 숨을 제대로 못 쉬니 자초지종도 들을 수 없어 우선 급한 대로 숨통을 틔어 놓고서야 대략적인 경위를 알 수 있었다.
경주 불국사 선방에서 하안거를 끝내고 통ㅇ사에 들러 월ㅇ종정스님을 친견한 직후부터 숨이 안 쉬어진다는 것이다. “종정스님께 무슨 짓을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공부를 물은 것”뿐이라는 것이다. 듣자하니 수좌가 백일하안거 중에 생겨난 의심 덩어리를 종정스님한테 물은 건데 법 거량절차가 잘 못된 불상사였다. 우선 밥부터 먹으라고 차려준 밥상은 수저도 못 들고 숨을 헐떡이며 연신 죽겠다는 것이다. 평소 이 승려의 언행을 미루어 고집이 셀뿐 예의를 저버리는 막된 사람은 아니었기에 대략 짐작이 갔었다. 아직 형이하학적 개념에 묶여있는 근기가 삼장법사 흉내를 내다가 자신이 쳐놓은 사상의 올가미에 걸려든 손오공 신세가 된 것이다.
나와 만행을 다니면서 해탈법이 경전속의 피동적인 마음뿐만이 아닌 것임을 자주 접했던 앞선 그림이 이 승려한테는 화근이었던 것이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자기들 종단 최고수장인 종정스님한테 대들다가 한 방망이 맞은 내상으로 사경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폐를 경화시켜 숨을 못 쉬어 죽게 된다는 것과 고통의 강도가 다르지 않는 것이 이런 경우다. 그가 누구이든 법사에게 법을 청할 땐 건방진 언행은 절대 금물이거늘 하안거 백일동안 몰아붙인 기상이 넘쳐 상대분간을 못한 탓이었다. 명색이 한국제일 불교종단의 종정인데 일개 수좌의 얄팍한 심상을 모를리 없다. 이런 건방진 놈 봐라싶어 자칫 도라고 착각하기 십상인 돼지 엇 발톱처럼 삐져나온 심상에 치명타가 가해졌던 것이다.
승속을 불문하고 불도를 지향하는 모든 수행자는 나름의 경험철학과 수행내공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혼에 깃드는 영원한 생명에너지인 해탈지혜를 강구하는데 전심전력을 쏟아 부은 원력이 쌓여있기 마련이다. 속세의 부귀명리를 초월한 무소유심의 결정체가 원융무애이고 능(能)한 즉사즉리(卽事卽理)가 바로 해탈지혜의 힘이다. 정법수행으로 사바세계를 달관한 사람의 심신에너지가 어떤 경로로 표출되느냐에 따라 돈오(頓悟)를 촉발시키고 중생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기에 불교는 하심이라는 겸손한 언행을 수행의 제일덕목으로 삼는다.
법봉을 얻어맞고 숨을 몰아쉬는 수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자해지가 급선무였다. 실기하면 영혼의 생채기가 고질병이 되어 이생의 불도는 헛수고가 되고 건강도 급속히 망가진다. 속물중생으로는 분해서 못살겠다고 삭발염의로 발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종교로 통칭되는 정신세계는 영혼의 영역인 무위법계와 맞닿아 유위법계보다 훨씬 더 민감하고 복잡한 시스템이며 위계질서도 엄격하다. 어둠이 깃드는 시간에 숨을 헐떡거리는 중을 태우고 월ㅇ종정이 주석한다는 양산 통ㅇ사로 출발하였다. 창원서 밀양을 거쳐 가지산을 넘어 영축산 통ㅇ사에 도착하니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사찰은 9시면 소등하고 잠자는 시간이지만 사정상 관행을 무시하고 월ㅇ종정이 거처하는 별당 출입문을 노크하였다. 출입문 좌우에 붙은 방에서 댓명의 학승들이 나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사족을 달지 않고 마루를 지나 불 켜진 종정스님 방으로 안내하였다. 방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서려니 방바닥이 온통 붓글씨로 가득하였다. 당직자들이 손님이 왔다고 전하는데도 종정은 액자붓글씨에 빠져 머리도 안 들고 경상도 사투리로 딱 한마디 "왔는교" 하였다. 수좌가 숨을 못 쉬고 헐떡거리는 판국인데 그깟 먹물이 뭔 대수라고 첫 인상이 어긋났었다. 방문턱에 발을 걸치고 서있다 보니 종정비서 같은 학승들도 그대로 마루에 머물렀다. 야밤에 산중으로 사람이 찾아왔으면 하던 짓을 그치고 맞이하는 것이 사람도리다. 일단 방에 들어가야 수좌에게 숨을 못 쉬도록 만든 그놈의 법봉 약 처방을 받든지 말든지 할 건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먹물을 말린다고 방안가득 펼쳐놓은 붓글씨 종이를 발로 쓱 밀쳐 방구석에 구겨 넣으면서 “사람이 찾아왔으면 맞이해야 될게 아니냐”고 애한테 이르듯 책망하였더니 그제야 붓을 놓고 “아이구”하면서 앉으라고 권하였다. 월ㅇ종정 글 한 점이 억 소리를 한다던 때가 그즈음이다.
첫 대면이 껄끄럽다보니 통성명도 없이 내 곁에 엉거주춤 꿇어앉은 중을 가리키며 “이 수좌를 알지요”하고 물었더니 단박에 “아까 낮에 왔던 중이네”하였다. 총기가 초롱초롱하였다. 옳거니 싶어“종정이 공부를 묻는 수좌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이 석가부처님 뜻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던졌다. 그러자 일체 이유도 따지지도 않고 즉시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나왔다. "이게 석가부처님 뜻이냐"는 결정적인 물음에 만약 사족을 달았다면 사생결단이 날판인데 그도 뭘 알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월ㅇ종정의 솔직한 두 마디에 시비가 뚝 그쳐버리니 다음은 내 숙제가 남았다. 난들 이런 희유한 경험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어느 하 세월에 8만4천경을 비유로 당면문제를 해결할 상황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화해는 어릴 때 동네친구들과 싸우면 서로 터진 코피 닦아주고 악수하였던 기억이 다였다. 사람 사는 이치야 거기서 거기니 절 집안도 별반 다를 것이 없겠다 싶고 그즈음에는 상호 큰절하는 사찰문화를 알고 있어 두 사람에게 맞절을 하라고 시켰다. 도력이 쌓인 고승이라 그런지 군소리 없이 젊은 수좌와 한차례 맞절을 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로 마주보고 있기에 이정도로는 뭔가 간이 안 맞는 것 같아 악수까지 권하였다. 일체 불쾌한 기색도 없이 요구대로 꼬박꼬박 맞절을 하고 악수까지 한 후 사찰족보를 따져보니 두 사람은 통ㅇ사 문중 할아버지와 손자관계였다. 도원결의가 연상되는 이 장면은 불가에서는 선례가 없을 듯하고 학인들이 여럿 지켜보았지만 어떠한 구설수도 후유증도 없는 신통스런 효력의 약 처방이 되었다. 지금에서 되돌아보면 한국불교사에 전무후무할 법봉사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한 토막 촌극이었지만 어쨌든 그 즉시 수좌의 숨통이 열렸고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서로 약조하고 헤어진 세월이 어언 사반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