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 참선법과 야단법석
덕숭산 선(禪)이야기는 새천년이 시작되는 서기 2천년 이른 봄 날 수덕사가 발원지다. 충남 예산 덕숭산은 단아한 수덕사를 품고 있어 참선수행자의 마음을 덕성으로 다듬고 안정시키는데 좋은 기상이다. 참선공부의 정점은 생성소멸 연기하는 자연의 섭리와 동체대비이기에 가없는 대자연과 교감하며 심신의 조화를 이루는 만행수행은 필수다. 왜냐하면 부처는 말하는 무위자연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세상 그 어떤 종교와 철학도 연기법에 귀속된 논리일 뿐이기에 궁극의 열반적정은 참 진리의 당처인 대자연의 섭리에서 체득된다. 장엄하고 수려한 대자연의 순수한 기상으로 자신의 마음동산을 꾸미는 열정은 열반묘심을 위한 비상한 노력의 일환이다. 난 경계 이후 대한민국 방방곡곡은 물론 중원과 미주, 아프리카만행을 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무위법계 실상을 접하는 경계가 수차례 있었다. 지금에서 되돌아보면 대륙을 건너뛰며 희유한 경계체험으로 특정 영역에서의 요해와 평정을 도모하였던 주경야독의 지구촌만행은 제불보살님의 가호였다.
덕숭산 만공탑과 초당을 둘러보고 수덕사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구석에 쌓여있는 간행물을 펼쳐보니 참선법(參禪法)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제자가 ㅇㅇ대 선학과 교수이자 선박사라는 요란한 직함의 승려교수 선법강의를 정리한 인쇄물이었다. 그가 누구든 분별상이 떨어지지 않은 참선법문은 어불성설이기에 저자의 특이한 경력에 관심을 두고 글을 살펴보니 선(禪)근처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불상 뒤 호법 신장자리에 둥근 원을 그려놓고 자기는 공(空)을 득해서 그런다기에 그럼 체득한 공을 보자고 하였더니 덜렁 불상을 들어내고 먹물로 그린 둥근 공 그림을 보이기에 싸대기를 후려갈겼던 수원의 어느 큰 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참 선(禪)은 텅 빈 가운데 불꽃처럼 성립되는 마음의 힘이기에 언어도단 불립문자 심행처멸이지만 공(空)을 기반으로 한다. 색(色)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空)은 천지를 꿰뚫는 학문과 첨단과학기술로도 해득이 불가한 것은 무심인연이 아니면 상대분별을 벗어난 공(空)세계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각(獨覺)은 전생공력이기에 해당사항이 없지만 성문(聲聞)은 무심인연이 아니면 천생을 닦아도 공(空)세계관이 요해되는 무아(無我)는 기대난망이다. 왜냐면 공은 삼천대천 온 우주에 빈틈없이 가득하지만 시절인연이 닿지 않으면 요령불가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상이 있으면 삼라만상이 색(色)이고 마음에 분별상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공(空)이고 무아(無我)이자 부처님 마음인 참 선(禪)이다. 실상관법으로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을 제도하면 저절로 공과 계합되는 이치이거늘 원래 제자리에 잘 있는 공을 찢고 뒤집는 언어기술을 법으로 삼는 시대가 말법세상이다. 닭 벼슬보다 못한 중 벼슬을 흠모하는 맹목적인 불자가 지천인데 열반묘심인 참선세계를 오도하여 일러준 대강백의 죽은 문자 선을 그대로 묵인할 수 없었다.
다음날 수ㅇ사 홈페이지에 실명을 밝히고 ㅇㅇ교수의 선법에 대한 비판 글을 띄웠다. 그로부터 나와 그의 참선법논쟁은 수ㅇ사와 본원 홈페이지가 후끈 달아오를 만큼 격렬해졌다. 당시 우곡선원 법상토론이 제방의 관심사였던 것은 한국 불교에서 본원이 가장 먼저 사이버선원을 개설하였고 법상토론장에 매일 수천 네티즌불자들이 동참하던 때였다. 두 선원 홈페이지를 오가며 벌어지는 격렬한 무차선 법상토론은 한국최초 사이버법당의 진면목이었지만 무늬를 벗어나지 못한 말세불교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종교를 뛰어넘은 참선법의 정수를 사바중생은 쉬 가늠할 수 없기에 법상토론이 무섭다는 하소연이 쇄도하였다. 결국 수ㅇ사 측에서 사이버법당의 참선법논쟁을 제지하였다. 누구나 접근하는 온라인에서 불교대학 최고 위상의 선박사가 무너지는 상황을 더 이상 수수방관 할 수 없다는 것이 중재 이유였다. 수ㅇ사측에서 정중하게 논쟁중지를 요청하기에 깨끗이 접고 그날로 만행을 떠났다.
추풍령을 넘을 즈음에 ㅇㅇ교수가 본원으로 나를 찾았다는 전갈이 왔다. 소임자가 만행을 떠났다고 대답하자 출가스님들의 만행을 속가의 처사가 다닌다고 힐난하기에 그럼 다친다고 경고하였지만 안하무인이었다는 것이다. 수ㅇ사측이 고매한 승려교수 위상을 보호하느라 논쟁을 종식시켰음에도 인격비하와 본원 정체성을 비난하는 시정잡배 같은 태도는 관용 불가였다. 불교는 석가부처님의 삶과 해탈정신이고 선(禪)은 불교가 탄생하기 이전 생사에 자재하고 무량한 지혜를 갖춘 대자유인의 마음이다. 저명한 불교대학에서 선법을 가르치는 선박사라면 생불 같은 위상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부처는 공사에 부끄러움을 알고 하심과 겸손, 무 명예가 본래면목인데 이 승려교수는 그렇지 않았다. 석가부처님도 공자도 무학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까짓 불교대학의 선박사가 뭐라고 건방진 아상의 섶을 껴안고 생사경계가 없는 불(佛)세계로 뛰어들었다. 만행수행은 천지만물 유·무정과 교감하는 현장체험과 같은 것으로 이 말법세상 잡동사니 종교논리는 진즉에 초월한 최상승의 심신수행법이다. 만행수행의 심오한 뜻을 알면 종교와 승속에 걸려있는 근기로는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차원이다. 만행수행을 산천유희로 착각하는 식자가 대학에서 선법을 가르쳤다는 것은 참 선법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서울로 차를 돌려 소집한 본원 임원들에게 위 사실을 공지하고 이 교수를 만 3일 72시간 내에 사이버광장에서 완벽하게 조복 받겠다고 선언하였다. 사부대중들은 이 교수가 한국불교계의 전설인데 인터넷공간에서 순순히 조복할지에 반신반의였다. 더구나 서울 한복판에서의 목탁참상 기억이 생생한 때였기에 저명한 승려교수를 제도하면 뭇 중이 양재동으로 몰려올 것을 우려하였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것도 아니었다. 무늬에 도취되어 사리분별도 못하는 최상위 불교지도자의 그릇됨을 제도하지 않으면 불전에 누가되고 오류투성이 참선법을 묵인하는 꼴이라고 판단했다. 다음날 본 우곡선원과 수ㅇ사 홈페이지에 만3일 72시간을 단1초도 넘기지 말고 모든 불자들이 이해될 언어로 당신의 허물에 대한 참회문을 올리라고 통고하였다. 3일의 말미를 주는 것은 선 박사 위상과 나와 논쟁한 네티즌 도반으로서 마지막 베푸는 인간적인 배려라는 것도 첨언하여 띄웠다. 그로부터 내가 지정한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엄수하여 인터넷에 자신의 법명과 속명을 기재하여 절절한 참회문을 올리고 용서를 구하였다.
불교의 참 선법은 석가부처님의 삶과 해탈정신이 담긴 무량한 법보이기에 불연이 있으면 누구나 빈 마음그릇만큼 무심지혜를 득할 수 있다. 그러나 먹물로 채운 식견과 아만으로 불전에 누를 끼친 죄업은 그의 영혼이 우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이유는 호법신장이 불(佛)과 둘 아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건강문제로 수년간 학교를 쉬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들숨날숨을 계속하면서 업을 감면하였다면 최후의 명(命)을 엄수한 참회 덕분일 것이다. 불교는 인간세계 최 극점이자 최후영역인 시간과 공간마저 뛰어넘은 대우주의 섭리와 티끌만큼도 어긋나지 않는 한량없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불도는 유·무위법계가 양립하는 대우주의 무한세계관을 터득한 무심법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있다. 구우일모에 불과한 알량한 식견으로 무량한 선법에 도전하는 것은 불을 보고 덤벼드는 부나방과 다르지 않다.
한국 불교사에서 전무후무한 본 참선법 논쟁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옮겨가며 빚어진 참사였다. 나와 그의 선법논쟁과 최후 통지문, 참회 글이 프린트되어 대학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본원 법상토론 일부를 삭제하였지만 이미 늦었다. 열반묘심인 참선법이 학문으로 규명될 영역이면 부처는 속세의 벼슬이고 애끓는 불도는 인생낭비다. 무심인연이 아니면 여하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생사해탈법의 정수 참선법을 득하지 못하기에 흔히 불교를 심법이라 일컫는다. 그가 한국 선불교를 상징하는 승려교수였기에 후유증도 컸지만 반하여 불교계의 위계질서가 제자리를 잡는 순기능도 있었다. 우곡선원 참선법회는 석가부처님 회상 당시와 다름없는 즉석에서 묻고 답하는 야단법석이지만 내가 재가자 모습이기에 제방의 음해와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초조인 석가부처님이 삭발한 승려모습이며 무슨 불교종단 출신쯤으로 여기는 청맹과니 무늬불교에 어느 날 신성처럼 떠오른 우곡선원이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하늘의 법도는 성긴 것 같아도 결코 어긋남이 없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이다. 무량한 불(佛)세계를 자유자재하는 대자유인의 마음인 참 선법은 이심전심으로 깨우치는 법도이지 불완전한 언어로 정의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 같고 가시에 찔리지 않는 바람 같은 참 선법의 정설은커녕 겨우 공(空)에 매달린 불교학자의 경거망동은 판 갈이를 자초하였다. 그로부터 눈 세개 달린 인간이 아니면 천만년 세월이 흘러도 본원의 참 선법을 깨트릴 위인도 시비도 없을 것이라고 천명한 세월이 어언 20년이지만 아직 유효하다. 왜냐하면 본 사단법인 우곡선원은 오로지 일승법(一乘法)이며 영원불멸인 석가부처님의 열반묘심을 계승하는 적자(適者)이자 법손(法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