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통찰한 무위법계[Ⅰ]∼[Ⅱ]

 

[Ⅱ] Baringo에서 무위법계를 통찰하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는 해발 2천M 선상의 도시이기에 열대지방 같지 않고 항상 선들선들한 기온이 딱 살기 좋은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다. 무위법계를 통찰한 바링고 호수는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차로 7시간을 달려 소말리아 국경과 가까운 석호다. 출장길에 여기 바링고 클럽에 여장을 푼 것은 이텐이라는 사업현장을 찾아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케냐정부는 사파리관광이 주 수입원이었기에 규모 있는 사업을 도모할 재정형편이 아니었다. 북부지방의 산림자원 외는 지하자원도 별로 없어 UN으로부터 산림보존 자금을 지원받는 처지인데 무슨 강단인지 케냐 산림청이 나한테 산림개발 허가권을 덜렁 내주었다. 목재생산에 적합한 북부지방의 이텐과 찬푼다 분지에 댐을 지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실무자들을 대동한 일정이었다. 그즈음 난 미국의 모 교육재단 한국지사장을 맡아 LOAN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파키스탄 전력사업과 아프리카사업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텐으로 가는 길에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무대와 홍학의 군무 나이바샤를 잠시 둘러 본 후 나쿠르 지방정부 산림국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바링고 클럽에 도착하니 해가 기울었다.

바링고 호수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은 둘레가 270km나 되는 석호로서 호수주변은 광활한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호수 안에 몇 개의 섬이 있고 수증기 자욱한 온천수가 솟아나는 섬도 있었다. 인간이 창조한 물질문명이 불필요한 지구생명체에게 최적의 생존환경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한 화폭에 다 담을 수 없는 광활한 경관과 심신이 스며드는 고즈넉한 풍경 위로 불타는 아프리카 일몰은 탄성을 자아내었다. 야생동물을 조심해야 된다는 경호원을 저 만큼 뒤따르게 하고 끝없이 펼쳐진 호수주변 초원을 거닐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 몸의 세포가 송골송골 깨어난다.

아프리카 무역사업을 시작하던 당시의 난 인과윤회의 무위법계 실상을 모두 관통하지 못하여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경계 이후 무위법계의 화신과 마주쳤던 단편적인 경험은 간간히 있었지만 흔히 신의 세계로 불리는 저승에 머무는 업인의 실상과 인과윤회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었다. 생명체의 삶과 죽음의 결과가 담긴 무위법계가 선명해야만 유·무위법계와 자재로 회통하고 기를 운용할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력만으로는 궁극의 조화도 마음의 평정도 어렵거니와 운기가 원활하지 않다. 보고 듣고 맛본 느낌과 내면세계에 드러나는 단편적인 업인의 화현으로는 무위법계를 통찰하는데 때때로 갈애가 있었지만 의지로 보이지 않는 무위세계에 접근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Baringo Club은 영국인들이 건설한 방갈로 형태의 호텔이었다. 단층으로 펼쳐진 객실과 맞닿은 클럽정원은 기화요초가 독특한 향기를 내뿜고 화려한 깃을 가진 온갖 종류의 새들이 몰려와 지저귀는 풍경은 한없이 순수하고 평온한 마치 아름다운 동화세상 같았다. 붉은 노을이 광활한 초원을 드리우는 장엄함을 담으려 필을 들었지만 노트에 시선을 빼앗기는 틈새가 아까워 글을 쓸 수 없었다. 해외 출장업무는 촌각을 다투는 일정이어서 늘 때 묻지 않은 자연이 그리웠는데 상상 이상의 환경과 맞닥뜨려지니 안타까운 심사만 끝없이 밀려들었다. 해탈지혜는 지식이나 관념으로는 결코 체득할 수 없는 영역이듯 참선은 형이상학적인 염원의 세계이거나 유별난 종교행위가 아니라 연기 유전하는 유·무위법계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심신이 되기 위한 초과학적인 시스템이다. 나는 해외출장길 여러 나라를 건너는 비행 중에 그 아래 국토와 인간의 질을 가늠한다. 지각이 뒤틀리는 지진파나 기류변화는 물론 지하수맥을 감지하고 인간사를 읽는 것은 참선법의 기본 베이스지만 급격한 에너지 파장을 몸으로 감내할 때면 차라리 칠통 같은 중생으로 살지 못하는 회환도 있다. 불교는 초과학적인 기반 위에 존립하는 합리적인 종교이듯 쉼 없는 대자연의 에너지 파동을 느끼고 교감하지 못하는 무심지혜도 해탈성불도 없다. 따라서 참선수행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하여 유·무위세계와 가로막힘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대자유인이고 우주 만 법계와 동체대비를 이룬 불(佛)이라 일컫는다.

바링고 호수는 강우량에 따라 수면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석호이기에 물의 흐름도 없지만 기류의 변화가 거의 없어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참선공부는 정해진 처소가 없지만 때 묻지 않은 원시자연 그대로의 기상이 보존된 환경이 주어진 것은 불세계의 인간불사프로그램 중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06시부터 일정이 잡혀있어 잠을 청하는 순간 마치 영화관에 들어온 듯 내면세계에 천연색 스크린이 펼쳐지며 수십 수백만 년 전의 바링고 호수풍경이 드러났다. 그림의 내용과 느낌만 다를 뿐 92년 속초에서 무위법계를 통과하던 8시간과 같은 현상이 재현되었다. 그땐 업보중생이었던 내가 제도를 받는 주체가 되어 숙업을 녹이는 극한의 고락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여기서는 한편의 생생한 자연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특설무대의 관객이 되어 무수한 인과가 깃든 무위법계 실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밤 12시경 펜을 거두고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순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바링고 호수의 옛적 생멸역사가 재현되는 생생한 화면이 시공을 초월하여 나의 내면세계에 펼쳐졌다. 새벽4시 정각까지 바링고 초원에서 일어났던 수십만년 전 원시자연의 생사가 깃든 무위세상을 실상처럼 감상하면서 참선법의 마지막 퍼즐인 인과윤회 법칙이 끼워 맞춰졌다. 그 동안 국· 내외 만행과정에 인간모습의 영가를 접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가차 없이 드러나는 업인을 흩뜨려 버렸다. 지금에서 되돌아보면 무심법력으로부터 제도를 받기위한 업인의 화현임을 납득할 수 없었던 오류였다. 이날 바링고의 무위법계 실상이 드러나는 그림 중에 만약 인간모습이 있었다면 객관적인 감상이 아니라 늘 그랬듯이 서슴없이 업인을 흩뜨려버렸을 것이다. 이 사바세상 무수한 생명체 중에 인간 몸 받은 것은 정점에 도달한 행운이지만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사악하고 교활한 업인이었기에 화현자체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바링고에서 맞이한 무위법계는 추악한 인간형상이 없었고 거대한 생명체들의 생멸이 질펀한 원시자연 뿐이었기에 4시간 내내 몰아경지에 들 수 있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드러난 이 지역 무위법계 업인은 거대한 공룡이 타의로 생명을 빼앗길 때의 처절한 모습이 주류였다. 기류의 흐름이 거의 없는 지역인 만큼 오랜 옛적에 여기에 살았던 생명체의 업 인자가 마치 오랜 유물처럼 그대로 보존된 저승세계를 한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감상함으로서 무위법계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었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하듯 생명체의 죽음은 필연이다. 천명을 다한 순리적인 죽음이 아닌 약육강식 현장에서 명(命)이 단절되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한 업(業)이 진하듯 속물인간의 탐착에너지 또한 이와 못지않게 삿되고 질겨 다음 몸 받을 때까지 지옥이라 불리는 저승세계에서의 대기시간이 길다.

영혼의 윤회주기가 짧다는 것은 그만큼 전생업장을 녹일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이생에 비록 해탈성불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전생숙업을 선하고 가볍게 함으로서 내생에 좋은 국토,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인연만나 사생육도를 끝내는 해탈열반의 결정판이 바라밀행이다. 흔히 저승이라고 말하는 무위법계로는 생명력이 다한 이승의 죽음 이후가 아니면 작위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이날 한편의 드라마 같은 장대한 무위법계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유·무위법계를 통달해야 할 참선도리 문전에서 애간장을 태우는 심정을 지켜본 불보살님의 가호가 아니라면 그 어떤 말로도 해석이 불가능하다. 불가사의한 무위법계를 통찰하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심신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난 지금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나에게 새벽4시는 그해 속초에서의 경계와 연동되어 있듯 이날도 똑같은 패턴이었다. 바링고에서의 무위법계 체험기를 비롯하여 부사의 한 아프리카 무역사업은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옛일이 그림 같다. 호사다마가 인간사이듯 케냐의 제2인자 찰랑ㅇ씨가 나와 두 번의 미팅약속을 어김으로서 업무에 큰 낭패를 겪었던 직후 그는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난 곡절도 있었다.

내가 접한 바링고의 무위세계는 아득한 과거 이곳에 살았던 거대한 생명체의 인자가 수백만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몸에 대한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업인이 화면의 주인공이었다. 지구상에 퍼트려 놓은 생명체의 업 인자는 도처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여기 바링고가 실증의 현장이 되었던 것은 전생업인이 오랫동안 침잠될 환경요인이며 미지의 무위법계를 통찰하였던 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업인에 불과한 신(神)을 숭배하거나 미완의 픽션에 지나지 않는 여타 구원종교에 매몰당하지 않아야만 참 진리의 장명등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사바세상은 정치이념으로 변질된 종교전쟁과 패권 다툼으로 영일이 없다. 인류가 신의 영역으로 규정하는 무위법계 실상을 올바로 성찰하면 헛것을 쫓는 인생낭비도 없고 내 신앙이 진리이고 옳다는 종교전쟁도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인종 간의 갈등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무한 우주시간에 백년도 못사는 인간의 종착점은 죽음과 저승이라는 무위법계다. Baringo의 무위법계가 보여주듯 탐욕과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인간의 저승형벌은 저의 없이 살다 죽음을 맞이한 순수한 동물의 삶에 비할 바 아니다. 역동적인 현실을 등지지 않고 주경야독하며 유·무위법을 체득하는 우곡선원의 참선수행법을 인간불사에 재보시하려고 펼쳐든 아프리카 일기장은 여기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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