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곡의 날숨호흡과 실상관법[1]~[11]
[Ⅱ]
제 2편 서술에 앞서 본 우곡선원은 어렵게 터득한 날숨 호흡법을 놓고 버리기 위하여 날숨 호흡법을 수지 증득한다. 왜냐하면 일체만유 일월성신 유. 무위법계에 즉(卽)하는 무심지혜 즉, 무아(無我)는 들숨 날숨의 경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4. 호흡과 마음
호흡과 생명은 상호 직결되어 있으므로 호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몸과 마음의 생리와 형태가 달라진다. 호흡의 빈도가 낮으면 대체로 마음은 안정된다. 반대로 호흡이 짧고 빈도가 높으면 마음은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상태와 건강을 조절할 수 있다. 호(呼)와 흡(吸)의 상대적인 길이와 속도, 빈도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르다. 보통은 1분에 15-20회 호흡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1분에 5-10회 호흡을 할 수도 있다. 호흡의 길이가 길수록 대체로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은 그만큼 호흡횟수가 적어 천명인 생명력을 낭비하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
1) 들숨은 수동적 날숨은 능동적
들숨과 날숨은 상대적 이분법과 연동되어있다. 중생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좋아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가 빼앗기고 버리는 것이어서 나쁘다는 이분법에 사로 잡혀있듯 공기를 들여 마시는 들숨이 공기를 내쉬는 날숨보다 몸에 이로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생명유지에 들숨 날숨은 필연관계이지만 들숨은 수동적인 것이며 날숨은 능동적이다. 몸과 마음상태에 따라 들숨과 날숨의 상대적인 길이와 호흡의 강도가 다르다.
2) 들숨과 날숨의 차이에 따른 마음상태
들숨과 날숨은 정신작용과 운동 역학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들숨과 날숨을 따로 나누면 생각을 하는 등의 정신작용은 들숨을 많이 쉬고 몸동작을 할 때는 날숨을 많이 쉰다. 들숨이 커지면 생리적인 부하가 증가하며 비례하여 번뇌와 망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거나 놀라고 공포에 질릴 때면 심한 정신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럴 때는 과도하게 들숨을 몰아쉬며 심한 경우 들숨이 끝나지 않아 숨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심한 정신작용이 일어나면 들숨을 몰아쉬거나 화가 차면 긴 한숨을 쉬게 되는데 이것은 평상시에 들숨을 과도하게 쉬였기 때문에 긴 날숨인 “한 숨”을 쉬어 보상하려는 생리작용이다.
인간은 누구를 부르거나 울 때 아기를 안을 때 등 감정을 행동으로 표출할 때나 힘을 쓸 때는 숨을 내쉬며 동작을 한다. 울음을 오래 운 아이가 한동안 흐느끼는 것은 감정을 행동으로 표출하면서 과도하게 날숨을 쉬였기 때문에 긴 들숨인 흐느낌으로 보상한다. 이와 같이 날숨은 능동적인 동작을 유발하며 반대로 들숨은 수동적이며 번뇌 망상을 불러들인다. 들숨을 쉴 때는 언제나 수동적인 상태에 놓여있으면 사념이 생긴다. 더구나 복잡한 생각은 들숨을 더 많이 쉬게 하여 몸과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반대로 날숨을 쉬는 동안에는 잡다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호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완성의 길 도(道)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인연동기가 없다면 지극히 간단한 날숨호흡이 태산준령처럼 느껴진다.
5. 호흡과 기(氣)
심신수행자 대부분 호흡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 삼매에 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세간에는 많은 호흡법과 기(氣)와 연관 지은 해괴한 호흡법이 횡행하고 있다. 호흡이 해탈성불에 이르는 심신수련의 한 방편임을 알지 못하고 삿된 힘{氣}을 얻기 위하여 무슨 단전호흡에 매달려 몸과 정신을 망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가도 잡다한 단전호흡에 매달리는 이유는 몸과 정신의 결정체인 기(氣)를 원만하게 다스려 영원불멸의 재산 무심지혜를 증득하려 하지만 뜻을 이룬 구도자를 듣고 본 적이 없다.
6. 불가의 호흡법은 안반수의
우리의 생명은 부모인연에 의하여 작동되었듯 그 생명력의 징표인 호흡은 도(道)의 본성인 무위자연 법칙에 따른 순리적인 호흡이 가장 좋다. 호흡수련 과정에서 애써 불편과 고통을 초래하는 호흡은 체내에 독소가 생성되어 자기 자신의 건강과 생명력을 손상시킨다. 들숨과 날숨의 길이나 리듬을 무리하게 변형시키거나 숨을 일부러 참는 행위는 금물이다. 특히 지식(止息: 숨을 멈추는 것)을 오래하면 체내에 탁기를 생성시키므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물질이 그렇듯 호흡이든 생각이든 멈추고 고이면 반드시 썩는 것은 만고불변이다.
호흡의 생리적 행태적 역학과 그에 따른 마음작용을 체득하였다고 알려진 불타의 호흡법은 비교적 단순하다. 석가부처님의 호흡법이라고 전해오는 안반수의(安般守意: Anapanasati)는 날숨은 길게 들숨은 짧게 쉬라는 것이다.
잡아함경의 안반수의경을 인용하면 산스크리트어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의 아나(ana)는 숨 들어 쉬기를 뜻하고 파나(pana)는 숨 내쉬기 그리고 사티(sati)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석가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숨을 짧게 들어 마시고 길게 내쉬는 호흡법을 수행하면 몸은 피로하지 않고, 눈도 맑아지며 생기가 돌아 항상 즐거우며 미혹을 끊고 선정과 자비심이 충만한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7. 들숨은 버려라
우곡선원 참선공부에서 들숨은 인식조차 못 하도록 좌선 인도를 하지만 초심자 대부분은 그냥 숨 쉬는 것뿐인 날숨호흡을 대단히 어렵게 여긴다. 자기생명의 끈인 호흡마저 자기 의지대로 제어 못 하는 것은 들숨과 함께 탐욕이 무성하였던 전생훈습에서 놓여나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날숨을 부드럽고 길게 쉬고 들숨은 자연스레 놓아두면 의식의 충돌이 없어 마음이 편하고 몸에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 출식(出息)은 모든 매듭(結)을 해결하는 즉, 망념을 버리는 것이고 입식(入息)은 생각을 일으키는 원천이기 때문에 들숨을 인식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 단순하고 간단한 이치조차 터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분별망상이다. 호흡에서 들숨을 인식하면 번뇌 망상이 둑 터진 홍수처럼 밀려들기 때문에 본원의 좌선실수는 들숨은 버리게 하고 좌선을 인도한다.
8. 날숨호흡은 삼독을 제거하는 묘약
인간은 대다수 일생동안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숨을 인지하지 못한다. 호흡은 자신의 생명줄을 이어가는 소중한 끈인데도 자신이 숨을 쉬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호흡으로부터 해방되어진 선지식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인간불사 공덕 없이 기법으로 날숨을 쉬려하면 잠자던 마장이 미쳐 날뛰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전생업장을 제도하는 날숨호흡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무슨 단전호흡 등, 별스런 호흡법에 매달리는 사람치고 몸과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만에 하나도 없는 것은 대우주가 소중한 단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대우주가 전혀 다르지 않은 동체대비를 이루는 동기부여가 돈오(頓悟)이고 따라서 중생습기가 소멸된 사람이 진불(眞佛)이다. 그냥 숨 쉬는 것뿐인 날숨호흡이 중생에게는 날뛰는 황소 뿔 빼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일체만유와 동체대비가 아닌 속물중생의 상대분별이 내면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道)가 지극한 현실임을 체득하려면 시비분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날숨호흡 수련은 가장 쉽고 빠르게 분별세계를 소멸시켜 대우주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하는 비방이다.
9. 날숨호흡은 자아실현의 첫번째 관문
우곡의 날숨 호흡법은 건강을 지키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처음 내가 숨을 쉰다는 생각보다는 숨을 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점점 숨이 길게 나가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비례하여 심간이 조용하고 편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지간에 걸쳐있고 날숨호흡으로 마음을 평정시키면 오매불망 그리던 무아(無我)경지를 언뜻 맛보게 된다. 날숨호흡으로 잠시 맛본 환희지는 자기의 힘이 아닌 불보살의 가피력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날숨호흡의 맛에 도취되어 외골수가 되는 우를 방지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니까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르게 되더라는 선입견이 발동하면 두 번 다시 환희지는 없다. 참선공부에서 하심은 자기를 지키고 무심지혜를 증장시키는 제일의 덕목이다. 도를 이루었다는 아만이 기고만장하면 삼매는커녕 환(幻)에 사로잡히는 마왕의 자손이 된다.
10. 호흡을 버리다
해탈열반은 날숨호흡마저 버린 경지다.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 생명의 끈 숨을 초월하여 무심경지에 이르는 것은 상대분별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들숨호흡을 따라 작동되는 분별의식은 생존본능과 연동되어있는 전생습인 이기에 확철대오가 아니면 단박에 번뇌 망상을 제압하기는 무척 어렵다. 영혼에 각인된 전생업인이 발동하는 사념을 물리적 수단으로 제어할 수 없기에 정신을 치유한다는 온갖 종교가 있지만 그 역시 마음의 해방은커녕 되레 벗어놓지 못할 멍에로 전락한 지가 오래다.
날숨이 다하고 아직 들숨은 일어나지 않은 찰나의 분수령이 평등성지이기에 우리는 날숨호흡을 통하여 이분법에서 놓여난 영원한 생명 무심삼매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흔히 해탈열반이라는 무심경지는 시공간적으로는 찰나이고 의식적으로는 일체만유 유. 무정에도 걸림 없는 무아(無我)이다. 쉼 없이 교차하는 들숨과 날숨의 생리작용에서 일체 간섭이 배제된 찰나를 한 물건, 순수의식, 생명의 실상 등으로 지칭하지만 근본은 날숨호흡마저 놓아버린 무소유심이다.
11. 날숨호흡과 실상관법은 깨달음의 자양분
본원은 일상(日常)이 참선(參禪)이고 정도(正道)라는 당연한 사실에 기초하였기에 지난 30여 년을 주경야독하며 해탈법도의 정체성을 저잣거리 실사구시로 증명하였다. 부처는 생사이해가 분분한 속진세상을 벗어난 것이 아닌 일체처에 걸림 없는 마음이기에 정법을 수지 증득한 불제자의 일상적인 삶이 곧 구세제민이고 법보시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독창적인 참선법을 창안하였던 것이다. 사후세계 끝자락에서 겪는 생존본능 식(識)을 인위적으로 제어하는 날숨 호흡법과 존재의 근본 빛에너지를 체득하는 본원의 실상관법은 불연(佛緣)이 닿는 돈오(頓悟)의 필수기반이다. 동업중생을 위한 측은지심과 자비헌신하지 못하는 깨달음과 해탈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즈음 본원의 참선수행법을 널리 유포하는 것은 전생업장을 녹이고 무심지혜를 증득한 참사람의 역량이 더욱 절실한 난세이기에 참선수행으로 점오(漸悟)를 촉발하는 우곡의 날숨호흡법과 신묘한 실상관법을 기술하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