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도론 道談道論 2

 

<정신세계 웰빙라이프/200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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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무역회사를 하십니까?

98년도에 접었습니다.

그럼 98년 이후에 우곡선원을 바로 만드셨습니까?

아닙니다. 97년도에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메모하고,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적은 출장기를 책으로 냈고 이것들로 인해서 글도 쓰게 되었지요. 그러다 승가대학 교수가 회주로 있는 군포 산본의 한 사찰에서 왕래하며 법문을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경전이라고는 아는 게 육조단경 뿐이었지만 모든 것이 육조단경 안에 다 있는 거예요. 첫 법문이 심우도尋牛圖 였는데 당시 사찰 달력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 심우도 달력을 걸어 놓고 법문을 했는데 그 법문을 강원도 모 사찰 주지 스님이 들었던 거죠. 그분이 “주지를 접고 당신 밑에서 공부를 하겠다.” 해서 그분이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집필공간을 마련 해주었고 그 집필실이 牛谷禪院으로 탄생하게 된 동기입니다. 어찌 보면 그 양반이 저를 이 테두리 안에 집어넣은 대원력가 입니다. 하하하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계획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자율의지로 통한 것으로 보십니까?

자율의지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과정에 접어들게 된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봅니다. 내가 사전에 그러한 것에 소속되어 있던 것도 아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어요.

내가 무역을 통해 5년간 세계를 다니면서 만행을 하게 된 동기가 세상을 보면서 그 땅과 환경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 에너지의 모습이랄까, 에너지의 질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과 어떻게 발달해 갈 것인가, 그러한 환경 속에 사는 사람의 관습과 의식세계를 꿰뚫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극명하게 느낀 곳이 케냐 바링고 호수인데 지름이 300km정도 되는 곳인데 여기서 생활을 해보니 아무런 생각이 없어져요. 그 지역 사람들 눈을 보면 멍하니 아무런 의욕을 느낄 수 없어요. 흔히 말하면 무심이라고나 할까, 사실은 무기에 빠진 거지요. 이 곳에서 땅과 하늘이 가진 기운의 영향을 받으면 인간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고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역회사 운영 당시 아프리카, 미국 등 출장지에서]

환경이 그러해서 사람들 눈동자를 보면 아무런 의욕이 없는 것이다?

자연이 주는 조화, 그로써 인간이 가지는 특성, 그 곳에 태어나게 되는 원인,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갈 것인가의 예측이 가능하게 된다는 거죠. 그로써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되었지요.

불보살이 나를 이렇게 만행을 시키는구나, 무역회사를 통해 세상천지를 여행을 하게하고 그것도 단순한 만행이 아닌 그 지역의 권력의 힘이나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가면서 까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되는 경험. 이것이 나를 공부시키는 과정이었고 내 의지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의문을 떨치게 하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나 개인이 가지는 평화, 해탈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겠습니까.

무언가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을 못 찾았지만 지금은 지금하고 있는 것이 최선이니까 이 불교철학을 세상에 널리 알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 지겠구나, 자기 갈등의 지옥 속에서 헤매는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해 질 수 있겠구나! 한거지요. 나만의 경험에서 교육이란 이름의 제도권 안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우리 불교철학을 보면 상당히 독창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는 수행은 무의미해요. 그것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눈만 돌리면 다시 헛방이라는 것이죠.

모두는 아니지만 불교 종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집단이냐 하면, 부처님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고, 그 밑에 일반 불자가 있다는 그런 논리를 가지고 있어요. 이게 불교를 왜곡시키는 폐단이죠. 그런 관습을 받아들이면 수행은 끝난거예요. 아무리 닦아도 끝난거죠. 이런 관습을 어떻게 타파할 것이냐, 누군가는 봉화를 올려야겠다, 그렇게 해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껏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요구와 제의를 받았지만 종교를 위한 불교라면 너희나 해라, 나는 안 한다, 주의입니다. 정신세계사에서 사전 지식으로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내가 쓰는 표현이 좀 과격한 편입니다.

많이 과격하신 편이시죠. 하하하

하하하.

왜냐 인생은 한정되어져 있고 언젠가는 이 몸을 벗어야 하는데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중생과 타협하거나 중생의 요구에 부합하거나 중생의 바람과 예속되는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중생의 허물과 껍질을 깨게 해주는 것이 불법이 존재하는 이유인데, 깨고 나면 진정 자기 안의 극락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극락을 발견한 사람은 극락의 삶을 제어한다고요. 그것이 대자연의 모습이고 거기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여기 있는데 왜 그러고 있느냐! 내생에 당신이 또 언제 사람의 몸을 받고 바른 법 만나서 언제 자기 안의 극락을 회복할 것이냐!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깨어난다면 좋겠다, 한 사람의 개체는 별것이 아니겠지만 깨어난 사람의 정신력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면 어둠에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고 보며 이것이 정신적인 발전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발전 모두 포함된다고 봐요. 이런 것이 나는 ‘법보시’라 표현합니다.

기존 불교종단의 깨달음의 시각으로 보면 육신통은 어느 경지 또는 누진통에 다달았는지로 우곡선사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경지에까지 도달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육신통이라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보는데 억지로 인간의 정신영역의 한계를 나누다 보니까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첫째 머리가 안 아프더라는 거죠. 두통,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저는 머리가 아프다는 개념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과거에는 안 그랬죠. 자기로부터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다다른, 육신에 해방되는 과정을 얘기하자면 5가지를 말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번뇌가 나지 않는 삿된 생각이 끓지 않는 마음의 힘이 겸비된 사람을 누진통에 이른 사람이라 정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봅니다.

우리는 테크닉을 전혀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숨 잘 쉬고 바른 눈으로 밝은 귀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듣고 바르게 표현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다가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수행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우곡선원에도 선 수행의 4단계를 정의해 놓으셨던 대요. 상승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이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는데 여기서 수행하시는 분들이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물론 수행 중 탈락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뜻과 맞지 않아 초심자 교육에서 그만 두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수행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기육신에서는 해방이 되더라 이말입니다. 궁극적 질병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일상에서 오는 작은 육신의 장애들, 두통이 온다, 머리가 아프다 등 이런 육신적 부조화를 뛰어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아무리 바르게 해도 수행 중 상기증상을 겪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수행과정의 한 단계로 보는데요. 우곡선사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수행의 과정으로 인정을 합니다. 상기가 일어나는 동기는 아주 바람직합니다.

상기의 결과가 머리가 아픈 거죠, 약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죽비 하나로 해결합니다. 그 마음을 잘 챙기면 되는 거지요. 상기증상이 오면 의식이 수평적인 견해로 세상을 보고 교류하는 것이 아닌 위에서 밑으로 보게 됩니다. 나는 알고 너희는 모른다는 이분법적인 인식이 일어나서 육신에 과부하가 걸리고 신체를 아프게 몰아가는 거죠. 눈이 튀어나올 듯 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거죠. 상기가 발동 할 때는 굉장한 파워죠. 눈 속에 뒹굴어도 춥지 않게 되고 결국 그것이 고질병이 되어 상기증상이 되죠. 그런데 분산되는 에너지를 하나로 몰아서 자기 내면으로 써서 용트림시킬 수 있는 것이 굉장한 노력의 결과인데, 이것을 바로 경계를 뛰어넘는데 쓰면 안에서 밖으로 터지는 대폭발의 동기가 되는데 대부분 제대로 쓰는 방법을 모르더라는 거죠.

그러면 그러한 단계에서 괴로워하는 분이 우곡선원에서는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죠. 그것을 뛰어넘어 가죠. 우곡선원에서는 기복을 배제하고 일절 종교행위를 하지 않는, 경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꿰뚫어 가는 공부를 합니다.

간절히 구하고 원해서도 상기가 일어나는, 힘을 하나로 모으는 원인은 되지만 에너지가 하나로 모였을 때 다음 단계로 스스로 못 만들어 가는 거죠. 기복을 했든 의지를 했든 놓지 못하는 관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스스로 상기병을 만들어 버리죠.

우곡선원에서 상기병 증세를 보이는 많은 분이 찾아 오셨습니까?

지금까지도 많이 왔어요. 상기뿐만 아니라 자폐인 경우도 많이 해결했지요.

이런 경우도 나는 죽비 하나로 해결했는데 인간은 인간 자체가 모든 원인과 원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지식의 언어나 경험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고, 심법은 스스로의 자각으로 그런 능력을 개발해서 힘을 부여해 주는게 이 가르침이고 법입니다.

그럼 교감이 안 되는 자폐는 어떻게 치유 하십니까?

자폐아를 비정상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인간의 삶이 정상적이지 못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 애는 자기만족의 행복에 빠져있는 것이죠. 단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자폐로 보는 것입니다. 자폐아의 저 껍질을 깨면서 우리 인간의 투쟁과 갈등이 난무하는 사바세계를 걷게 하는 것이 어쩌면 불행인지 모르지만,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고통과 경험을 통해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완성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은 일반적 범주에서 관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본바탕이 하얗고 깨끗한 상태이기 때문에 보는 대로 정답이예요. 발달하고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요. 영재가 되기도 하지요. 가르치는 선생이 통제가 안 되는 거죠.

이런 경험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가령 인간이고, 그 시대에 태어났고, 그 부모 유전자를 받았으면 그것에 입각하는 사고가 깃들어야 하는데 자폐는 그러지 못한 것이거든요.

대부분 유인원의 영혼, 동물적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겁니다. 인간과 유사한 유형의 영혼이 육신의 주인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거죠. 이 영혼을 돌려보내고 원래 몸의 주인을 되찾게 해주는 과정이 맞바꾸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오로지 자각을 통해서 만이 가능한 거죠.

자각하는 과정을 과학적, 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영혼은 단독적인 영혼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모두가 영혼의 집인거죠. 이 영혼이 어느 몸에 안주 되었을 때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하고 의식이 일어나고 발달하게 되는데 결함이 있을 때는 안개처럼 일부 영혼은 허공에 흩어져 있다는 거지요. 그 안개의 낱낱의 이슬을 다시 불러 모아서 여기에 보충시키고 여기에 깃들어 있던, 잘못 세팅된 영혼을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것 또한 중생이라는 거죠. 인간이 몸뚱어리가 있어서 위대해 보이지만 똑 같은 중생이라 이거지요. 이 배턴 터치를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역할입니다. 이것이 기술이거나 의료가 아니라 자각을 통해서 스스로 에너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누가 자각을 하는 건가요?

그 감각을 가진 개체가, 그 자폐아가 자각하는 거지요. 머릿속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데 자각이 됩니다. 눈빛을 통해서... 눈은 마음의 창이지 않습니까.

결국은 영혼이 자각을 하는 것이 아니군요.

그렇죠. 감각을 통해서 영혼이 제자리를 찾는 거죠. 바로 영혼이 자각하는 것은 지식이고 그것이 지혜로 가는 거고, 결국 육신을 통해서 서서히 자각하게 해가는 거고 자각을 통해서 자폐에서 벗어나는 거죠.

 

일반인이 우곡사이트를 보면 이런 질문이 생길 것 같아서, 윤회輪廻가 있느냐 전생이 있느냐에 대해서 우곡선사께서는 없다고 표현하셨는데요.

해탈解脫하기 전에는 윤회의 굴레에 예속되어 있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과거 경험의 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죠. 해탈이라는 것은 과거 경험했던 의식으로 부터의 초월이거든요. 그래서 윤회란 없는 것이죠.

그럼 이런 질문을 다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어 육신이 있고 육신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영혼도 에너지의 집합체로 보는데 해탈했다고 해서 이 에너지의 집합체가 섞이지는 않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해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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