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도론 道談道論 3

 

<정신세계 웰빙라이프/200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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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런 질문을 다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어 육신이 있고 육신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영혼도 에너지의 집합체로 보는데 해탈했다고 해서 이 에너지의 집합체가 섞이지는 않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해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낱낱이 분해되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지요.

소위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의식이 있어서 한 것 아닙니까? 습에 엮이지 않아서 해탈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럼 해탈한 존재는 따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죠, 나는 이렇게 봅니다.

육신의 주인이라 보았을 때 정신이 동적 작용을 하는 것이 의식이고, 그 역량에 맞추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해탈은 그 의식이 낱낱이 경험한 것에 바탕을 두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확히 봄으로 의심이 남지 않아 그로 말미암아 주장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거지요.

해탈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유위의 해탈과 무위의 해탈이 있습니다. 몸이 있을 때의 해탈은 한계를 가지고 있죠. 그러나 몸이 있을 때 집착하지 않는, 의식에 구속당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몸이 없어져도 그것이 연속적으로 가서 무위의 해탈이 된다는 거죠.

그럼 무위의 열반, 해탈을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의식이 어디로 가느냐, 따로 가는 세계가 있느냐... 나는 아니라고 봐요. 의식이 있을 때 경험한 모든 것들, 그 경험의 대상이 무엇이냐, 이 변모하는 삼라만상의 이 세계다 이거죠. 지금도 그렇고 과거도 그랬고 이것으로 통해 의식이라는 정신체계를 갖추었는데 초월하게 되면 초월하는 대상,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식이 경험했던 곳으로 낱낱이 돌려줘 버린다는 겁니다. 회귀하는 것, 돌아가는 세계를 나는 무위의 열반이라 합니다.

그럼 달라이 라마의 경우 환생을 해서 그 사람의 분신을 찾아가서 데려옵니다. 달라이라마를 부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의 무슨 부처, 무슨 부처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해탈이 태초의 자리로 돌아간다면 부처에게는 환생이 선택사항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아니죠. 나는 티베트불교를 바른 불교로 보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특히 달라이 라마를 선택할 때 특이한 소양이나 전생의 기억력을 가진 애를 점검해서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종교지도자로 양성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보면 정반대되는 방향입니다. 전생에 얼마나 집착이 강하고 미련이 많았으면 몸을 바뀌어서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전생의 살았던 그 기억만을 기억하고 ‘내 거다! 네 거다!’ 한단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독소적 요소를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이 죽으면 의식세계가 다 흩어져야 하는데 한곳으로 모아져서 다시 환생하는 것은 그럼 집착과 탐욕의 결과로 이해해도 되는지요.

그렇죠. 집착과 아집이 강했기 때문에 몸을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기존 불교경전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전생에 부처였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해탈,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전생의 7가지의 삶의 공덕이 있어야만 깨달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부처님은 깨친 부처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이전의 부처는 깨친 부처가 아니라는 거죠. 바로 의인화시킨 부처의 행적을 통해서 그런 공덕이 쌓여야만 부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로는 피라미드 구조의 중생으로 구성된 하부에서 부처라는 꼭짓점의 아주 놓은 단계를 향해서 올라가 부처가 되고 나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아래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음. 등식만 바꾸면 정답 같은데요. ‘꼭짓점이 부처가 아니라 부처는 거꾸로 가장 낮은 지위와 가장 낮은 존재다.’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아무것도 지닌 바가 없고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아야만 부처가 됩니다. 그 자체가 중생인지도 모르고 달리 부처라는 등식을 만드는 데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수행자의 한계라고 봅니다.

양적으로 볼 때 깨달은 사람이 있어서 윤회하지 않으면 우주 전체의 개체로 보아서는 숫자가 줄어야 하는데 지구상의 개체로 볼 때 사람만을 예로 보더라도 과거보다 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입니까?

인간 존재 성립에 대해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요, 저도 그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중요한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존재 자체를 두개로 봅니다. 지식적으로 보면 정신적 세계와 육신의 세계, 생명으로 본다면 무엇이든 몸을 가지면 유정의 세계, 몸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정으로 불교는 보고 있습니다. 인간세계로만 논하자면 몸을 안 받아야 할 것들이 미리 와서 몸 받고 있고 또 빨리 가야 할 것들이 안가고 몸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여기서 부대끼는 거죠. 여기서 갈등이 엄청나게 발생하는 겁니다. 균형이 잘 이루어지면 갈등과 투쟁이 없는데, 지구라는 틀의 한계가 있어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2가지 존재의 균형이 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정과 무정의 합은 변화가 없고 무정의 것들이 빨리 유정의 몸을 받아서 유정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까?

네 그렇다고 봅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 몸 안에 영혼이 있는데 죽고 나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만 습으로써 윤회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예. 윤회는 통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60년을 산다고 보면 좋은 선행도 있을 것이요, 악업을 쌓기도 하는데 결국 공덕이 되지 못해서 지혜가 밝지 못해 집착하고 있는 요소들이 윤회하는 것이지 똑같은 개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거지요.

윤회에서 몸을 가지는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한다고 보십니까?

이 요소가 몸이 없을 때 몸속에서 지은 다른 인연에 의해서 만나는 것, 그것이 영혼이라는 매개체로 형성되고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 인연에 의해 가까이 있던 영혼, 중음신이 결합하여 이 3위 일체 요소에 의해서 다시 윤회하는 것이죠.

흔히들 ‘당신은 근기根機가 있어서 수행의 성과가 빠릅니다.’고 표현할 때 전생의 선업이나 닦은 복덕이 죽음으로써 흩어져 버린다면 그런 표현이 잘못된 것이지 않습니까, 아울러, 달라이 라마처럼 전생의 쌓은 수행의 선업과 복덕을 지닌 상태로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 계속 윤회하는 것이 더 바른 것이 아닌지요.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 전생에 무엇을 했던 달라이 라마라는 수행의 깊이라 할지라도 닦아서 그것마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현생에서 쌓은 복덕과 선업이 내생에서 해탈하는데 과연 어떠한 보탬이 됩니까.

음. 선업에 대해서 문기자께서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십니까?

솔직히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사께서 말씀하신 실상관법實像觀法에 시절인연에서 쌓은 악업을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인연이라는 관점에서 연결해보면 쌓는 선업도 인연의 결자해지의 요소가 아니라 인연의 끈을 늘려가는 원인으로 작용해서 결국은 해탈에 방해적 요소로 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해탈의 기본적 원인은 선업이고 해탈까지 다다르기까지는 한 가지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흑과 백을 분명히 관찰해서 속거나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인 정신, 마음의 힘 이것을 나는 ‘지혜’라 정의합니다. 이것을 미사여구로 표현하자면 맑다, 고요하다, 성스럽다, 아름답다, 위대하다고 표현하죠. 그 자체가 불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렇지만 선업과 해탈의 과정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선업을 쌓음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증득되고 지혜가 증득되어야 진정 집착에서 초월되는 해탈이 된다.’ 이런 등식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지혜라는 것도 흩어지지 않습니까?

지혜 자체는 어떤 형상이 될 수가 없죠. 죽고 나서 지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윤회할 요소들이 줄어드는 거죠. 지혜가 완전히 밝아버리면 윤회 그 자체가 멸실되어 버린다는 거죠. 만약 지혜가 완전하지 못해 일부 윤회할 요소가 남았다면 다음에 또 윤회합니다. 완전히 지혜가 밝아서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고 속지 않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마음의 평정이 된다면 윤회는 없죠.

전생에 선업을 쌓고 지혜에 의해서 흩어지고 나서 내생의 어떤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사람의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 세상에 뿌려지는 것이군요.

그럼요.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가 그것을 내포합니다.
선업 그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개인적인 삶이 보다 큰 전체적인 삶과 일체동근임을 이해하고 동업중생을 위해서 마음을 내고 몸을 쓰는 이런 에너지의 비중이 많을 때 이것이 ‘선업善業’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가 머리로는 이해되는 듯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앞에 있는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와 하나임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겠습니다.

원래 ‘너’라는 상대가 없는 거죠. 없어야죠, 단지 인연이고 필요에 의해서 방편들이 모인 것이지 만일 ‘나와 너’가 있다면 두 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해탈은 멀어요. 단지 선과 악을 논하고 대소 명암을 논하는 이유는 제도의 측면에서 방편을 세우는 것이지 전체적인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전이나 제가 만난 선지식이란 분들의 말씀 중에 ‘나(我) 이외는 허상이다.’ 라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내 의지와는 따로 행동하는 저 사람, 아! 그러면 저 사람도 나와 다른 독립된 존재구나, 그런데 어째서 나만 우주고 상대방은 우주가 아니라고 할까, 나와 저 사람이 밥을 먹는 걸로 봐도 똑같은 우주라는 것을 알겠는데 내 앞에 있는 너는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왜 그런가하면 업의 질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인간 자체를 전생 업보의 결과로 보았을 때 업의 질이 달라서 그런 겁니다. 동쪽으로 가려는 성향의 업이 있지만, 서쪽으로 가려는 업도 있고, 가지 않으려는 업도 있습니다. 업의 결과를 개체로 보았을 때 그 개체에 따라서 각자가 가진 소양대로 뜻대로 하려는 의지가 있는데 그것이 유기적인 생물체입니다. 그렇게 보면 되는 것입니다.

“all 중생이고 all 부처다.” 각각의 다른 모습은 업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볼 것인가 불쌍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런 눈들이 자꾸 열려야 이타심이 확대되고 그런 쪽으로 마음을 씀으로써 성인이 되고 그런 결과가 지혜로써 드러나고 그 지혜가 팽창되는 만큼 윤회해야 할 요인이 줄어드는 겁니다.

“내 앞에 있는 타인도 허상이 아니고 실상이다”는 말씀이시죠.

단지 벌어지면 그것이 허상이 된다는 것이죠. 이미 시간을 초과해 버렸기 때문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전체가 실상이지만 그 순간 찰나에서 한 치만 벌어져도 전부 허상입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 궁극적으로 다 실상이고 다 존귀합니다.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들 이야기합디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경전대로 종교의 진리대로 현실에서 믿고 따르며 그 진리에 꼭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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