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도론 道談道論 4
<정신세계 웰빙라이프/2006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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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경전대로 종교의 진리대로 현실에서 믿고 따르며 그 진리에 꼭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진리는 있지요.
그럼 그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인간도 진리 자체에 귀속되어 있고 진리세계에 하나의 구성원입니다. 단지 인간은 숫자나 상대를 세워서 또는 경전이라는, 진리라는 스스로 만든 믿음에 의해서 틀에 끼워 맞추려니까 비진리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경전은 단지 마음의 표현이고 숫자는 마음이 빚어내는 약속의 산물이라고 보면 그런 것에 속지 않습니다. 곧 진리적인 마음이 진리적인 삶입니다.
진리의 실상을 나는 이렇게 봅니다. 흔히 도가에서 이런 말을 합디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진리를 본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스승은 무엇이냐? 그것에 대한 답은 안 해 놓았더군요. 나는 진리의 스승을 이렇게 봅니다.
‘영위하는 존재의 실상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 자체가 진리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뿐 입이다. 왜 뭐든지 못 깨닫겠습니까. 다만, 욕망을 따르고 과거 습의 노예가 되어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고 희구하느라 그런 겁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이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 토대로써 세상을 봄으로 말미암아 직시되고 즉각 통찰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진리가 그런 것이라면 진리가 있고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상식이 있는데 진리와 상식은 실제 삶 속에서 구분되고 상반되지 않습니까?
상식은 인간이 의지로 빚어낸 약속의 산물이고 경험이지 그것을 진리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마음이라고 정의하시는 겁니까?
나는 진리를 마음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일반사람들은 이 마음 저 마음을 논하지만 삼라만상이, 우주 대자연이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무너졌다가 보이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것 그 자체가 진리인데, 단지 경전이라는 것을, 성인들의 말씀을 진리라 하는데 그분들은 이러한 진리의 실상을 먼저 경험하고 경험한 바를 보편적 논리로써 표현했을 뿐인 것입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습니까?
나는 없다고 봅니다.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진리가 있다는 것과 반대가 됩니다만.
궁극적인 절대선과 악은 없다! 단지 인간사회의 규범과 경험에서 그러한 것일 뿐입니다. 윤리 도덕적 관념에서는 살인이 죄악이 되지만 그 개체가 독립적 존재로 보았을 때, 이 사회와 관계가 없다고 보았을 때는 생존수단이고 약육강식이 아닙니까? 이것일 뿐이지 선과 악이라 평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이러한 틀 내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단지 진리, 성스러운 세계에 대한 맛본 바가 없기 때문에 동물적 욕구에 이끌림을 당해서 업장이 무거워서 그러한 악행을 하였구나! 라고 규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일 그가 위대한 진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접한 바가 있다면 그렇게 할 원인 자체가 안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만 가지고 논하는데 해탈의 세계는 결과 이전에 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빚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결과 이전에 원인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악행이라고 하는 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해탈이고 곧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자는 그러한 길을 걷지 않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보살의 가피력이라는 것이 개입됩니다.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그러한 정신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악행이나 악습의 노예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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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과 정신精神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십니까? 무심無心이라는 것은 자기가 안주하거나, 무심이라는 바다에 헤엄치고 노니는 그런 차원이 아닌 무심은 에너지입니다. 야구공처럼 던지거나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정교하고 가장 순간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우리 인간의 의식이 닿기 어렵고 닿아서 행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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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의 존재에 대해서 탐구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아함경의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쓸모없는 질문이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신과 우주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십니까?
‘신神은 몸 없는 중생衆生이다.’ 라고 정의 합니다. 그 이름에 관계없이 불쌍한 존재이고 윤회의 틀에서 보면 신神은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집착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주는 무극無極이라고 표현할까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극에서 소리, 이것을 불교에서 옴의 파장인데 이 파장이 그 어떤 고주파 보다도 정교합니다. 그때 이 옴 소리가 때려서 양극兩極이 되었다고 봅니다.
누가 소리를 내었습니까?
누가 한 것이 아니고 그게 우주의 질서고 기본 방향입니다. 누가라는 가설을 넣으면 신, 창조주를 넣어 설명해야 하는데 창조주가 존재합니까? “우리 스스로가 창조주인데, 생각하고 빚고 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는데 달리 창조주를 설정하고 있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고 봅니다.
불교는 아주 정밀하고 매우 논리적인데 이 부분만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논리로써 검증할 이유는 없죠. 창조주가 했다는 다른 이설이나 타 종교의 교리를 접목해서 자기를 보니까 문제입니다. 그 자체가 언어장애인데 그게 무엇입니까.
부처님이나 창조주가 그렇게 위대하고 전지전능하다면 부처님이 뭣하러 어렵게 닦아서 고를 없앱니까. 날 때부터 고를 없앴다면 우리 인간이 왜 이런 희로애락을 겪도록 생명이 부여되고 생사가 반복되는 인간이란 생명체를 빚어냈을까요? 그런 가설을 세우는 자체가 모순이고 어리석다고 봅니다. 결국 신이라는 몸 없는 에너지의 역할(미래를 예견하는 것 등)들, “아! 그것이 지식과 과학을 앞서가더라, 사람들이 의지하더라, 나도 믿으면 교감이 되겠더라.” 이런 것들이 신이라는 허구 세계를 설정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내가 죽어보니까 그런 거 없어요. 죽어서 돌아보니까 부모나 형제, 부처님, 어느 누구도 나를 어쩌지 못합니다. 업보에 따라서 업 가는 대로 그대로 정신적 세계든, 육신의 세계든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고의 단계가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깜깜한 두려움 그 다음은 찢어지는 고통. 고통의 강도가 깊어지고 그것마저 깨어 졌을 때 밝음의 세계가 오고, 밝음에서 내가 구하지 않은 밝음 그것도 아니더군요.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 그것마저 탐하지 않았을 때 그때 자기 소리가 나옵니다. 그 소리마저도 안 된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무언가 이 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나룻배가 있어야 강을 건너듯이 그것이 무엇이냐, 이 위대한 진리의 세계를 발견한 석가부처님의 눈빛과 환한미소였었고, 그러한 인연동기가 오늘날의 나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제 책(놓고 비우고 버리기) 에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내용을 적어 두었어요. 남들처럼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그대로를 써 두었습니다.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우곡선사께서는 우리나라 불교종단을 상대로 해서 살아남은 유일한 개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선사께서 주장하셨던 많은 부분이 지금은 대다수 불교 종단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네! 실상관법에 대해 가장 큰 불교종단에서 관심을 두고 몇 차례 다녀가서 지금은 실상관법이 정식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불교종단들도 지금은 많이 변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도와 깨달음에 대해 또 논할 기회가 된다면 그때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인터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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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1세기 한국의 최고 정신지도자들과의 만남을 기획한
정신세계원은
牛谷 張明和 선사님이 첫 주자로 선정되어 인터뷰에 응하였고 첫 번째 주자가 다음 대담자를 추천하는 식으로 기획되었었다. 사회자는 다음 대담자로 누구를 추천할지 물었다. 牛谷 선사님은 최고의 정신지도자로 단박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추천하였다. 왜냐고 묻는 질문에 "한치 두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칭 동서양의 교주와 엉터리 정신지도자들 판인데 내가 누구를 추천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이 시대 최고 정신지도자들과의 만남을 기획한 본 도담도론은 牛谷 선사님이 최초이자 마지막 대담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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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일상(日常)이다. "
특이한 모습을 주장하는 것은 낭비가 되고, 상(相)이 될 뿐이다.
수행은 보편타당한 행위와 평상심에 바탕을 둔 순수한 행(行)이자 소중한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