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牛谷의 실상관법
本 牛谷禪院에서 참선공부의 기본 바탕으로 삼는 실상관법(實像觀法)은 독각(獨覺)의 표상인 牛谷禪師님의 실상체험에 의한 것으로서 후일 납자들이 이 관법(觀法)을 불교 문헌에서 발견, 고증할 수 있었다. 牛谷禪院의 실상관법이 초조(初祖)의 해탈법(解脫法)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불필요한 종교 행위를 배제한 효과적인 심신수행과 자유자재로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牛谷의 실천 수행력에서 검증할 수 있다.
1. 실상관법(實像觀法)이란?
연기(緣起)하는 존재(存在)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는 것을 실상관법이라 하며, 이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淨) 간에 끊어짐 없는 선정(禪定)을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심신수행법으로 정의한다.
2. 실상관 수행법
존재의 근본인 빛 속에서는 무명(無明)도 없거니와 고통을 불러들이는 인간의 번뇌 또한 없다. 저물어 가는 붉은 해를 단전(丹田)으로 뚜렷하게 관(觀)하여 즉시 망념을 끊고 근본으로 회귀하는 참선수행의 첫째는 일상관(日想觀)이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일심(一心)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쪽을 향하여 곧게 앉아 저물어 가는 붉은 해를 관(觀)하라. 마음을 굳게 가다듬어 생각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이제 곧 해가 지려는 그 모습을 마치 하늘에 둥근 북을 걸어 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관(觀)하라. 이렇게 하여 해지는 모습을 다 관(觀)하였으면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그 모습이 뚜렷하게 마음에 떠 오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일상관(日想觀)이라고 이름한다.(佛說觀無量壽經)
'붉은 해'를 관(觀)할 때, '좋다, 싫다, 된다, 안 된다' 등의 분별을 하게 되면, 그 순간 고정관념(業識)이 와르르 발동하여, 업식의 훈습이 그대로 상속(相續)되므로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을 관(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고정관념이 발동하기 직전의 순수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 장작불의 열기(熱氣)에 눅눅한 습기가 마르듯이, 순수의식에 의해 업식(業識)의 훈습이 소멸되므로 대 우주와 내가 자연스럽게 합일(合一)해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을 우리는 실상관(實像觀)이라 한다.
물 기운은 너그러움으로 만물을 수용하고 본성은 생명을 포태한 단초이다. 그것 중에 이른 봄 따스한 햇살에 녹는 얼음 끝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에서 반사되는 영롱한 빛을 관(觀)하면서 존재(存在)의 본질(本質)과 합일해 들어가는 것을 수상관(水想觀)이라 하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물의 맑고 고요함을 주시 하되 그 영상이 분명하게 남아 생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물의 모습을 다 관(觀)하였으면 다음에는 물이 얼음이 되는 모습을 관하라. 얼음의 티없이 맑은 모습을 관하였으면 안과 밖으로 광명(光明)이 비쳐 나가는 유리 같은 땅을 관하라. 그 유리의 땅 아래에는 금강석과 같이 강한 황금의 받침이 칠보로 빛나면서 대지(大地)를 받치고 그 받침은 팔방팔각의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낱낱의 면은 백가지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천가지의 광명이 흘러나오고 낱낱의 광명 속에 팔만사천의 빛깔이 있어서 유리의 대지에 비치고 그 눈부심은 마치 백천의 태양빛을 무색하게 하는 것과 같다. 또 그 유리같은 땅 위에는 황금의 노끈을 그은 것 같이 칠보에 빛나는 길이 가로 세로로 그어져서 모두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보석 속에 오백의 빛이 꽃같이 빛나 밤하늘의 별과 달이 허공에 달려 있는 듯하더니 어느새 광명의 별자리(星座)로 화(化)하고 그 위에는 백의 보석으로 장식된 백천의 누각이 보이고 별자리의 양 가에는 백억의 꽃받침과 무수한 악기로서 장엄되어 있고 광명에서 흘러나오는 여덟 가지의 맑은 바람이 무수한 악기를 스치면서 나오는 소리는 "미혹한 세계는 고(苦)이며 실체 없는 공(空)이다. 모든 것은 생멸 변화(生滅 變化)하여 고정됨이 없으니 모두가 나(我)라고 집착할 것이 없다."고 하는 존재의 도리를 설한다. 이것을 수상관(水想觀)이라 한다. (佛說觀無量壽經)
관(觀)하는 대상이 태양과 같은 불(火) 기운의 빛(光明)일 경우에는 이를 일상관(日想觀) 또는 화관(火觀)이라 부르고, 맑고 영롱한 물방울과 같이 물(水) 기운의 빛(光明)일 경우에는 이를 수상관(水想觀) 또는 수관(水觀)이라 부르며, 대지와 같이 땅(土) 기운의 빛(光明)일 경우에는 이를 지상관(地想觀)이라 부른다. 이렇게 실상관(實像觀)의 대상은 그 어떤 것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두가 실상관(實像觀)의 대상이 되며, 이 실상관(實像觀)으로 나의 고정관념(業識)이 충분하게 녹아 들면 내 안에 대우주를 다 퍼 담아도 부족하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은 평정에 이르게 되며, 합일(合一)의 경지인 평등성지(平等性智)에 이르게 된다.
3. 수행 자세에 대하여
가. 몸 전체(全體)로 다가서야
실상관법은 본질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본질에 이르는 방법이다. 실상관법은 <why: 이유>가 아니라 <how: 방법>의 세계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진리에 이르느냐의 문제이다. 철학은 이렇게 묻는다. "존재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러나 과학은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존재의 실상을 경험할 수 있는가?" 실상관법(實像觀法)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지적인 이해를 위한 지식만 준비되어 있으면 가능하다.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개념만 이해하고 있다면 수행자 자신의 어떠한 변형이나 변화가 전혀 없어도 즉 지금 이대로의 상태에서 얼마든지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관법은 그렇지 않다. 실상관법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행자 자신의 변화와 성숙이 필요하다. 수행자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한 존재의 실상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적인 이해의 세계가 아니라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자연과 나의 성품이 서로 연결되는 구체적인 체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수행자의 사고(思考)와 두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실상관법은 수행자 전체를 필요로 한다. 존재의 실상을 수용하기 위하여 수행자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상관법은 철학과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눈먼 사람이 묻는다. <빛이 무엇인가?>철학은 빛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지적인 설명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관법에서는 <빛이 무엇인가?>를 묻는 즉시 묻는 그 자신이 지금 눈 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 다음 그를 변화 시켜 그로 하여금 직접 빛이 무엇인지를 체험케 한다. 실상관법에서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빛의 내면 즉 존재의 실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빛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가를 말할 뿐이다.
실상관법에 있어서는 <하는 것:doing>은 <아는 것:knowing>이다. 이것 이상의 다른 '앎'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변형되지 않는다면, 마음이 열려지지 않는다면, 즉 고정관념(業識)을 넘어서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거기에 더 이상의 체험은 없다.
나. 먼저 공덕을 쌓아야
실상관은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구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식구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완전한 받아들임 즉 완전수용의 열린 의식구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놓지 않으면, 존재의 실상이 나를 꿰뚫고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실상과 나 사이에 이러한 진한 통(通)함이 없을 때는 진아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自性)을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실상관법을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의 자물쇠를 모두 부숴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존재의 실상이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나의 선입견이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마음의 문(門)에 어떠한 방어도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마음의 밭을 먼저 정성껏 가꾸어 놓아야 한다.
1) 계행(戒行)의 실천 : 부모님에게 효(孝)를 다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하여 섬기며, 생명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십선(十善)을 행(行)하여 어진 생활을 영위한다.
2) 삼귀의(三歸依) : 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도 결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깨달은 마음을, 생각 생각마다 삿되지 않는 올바른 마음을, 항상 깨끗함으로 돌아가 비록 번뇌와 망념이 일어나도 자성(自性)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마음을 언제나 유지한다.
3) 지혜의 실천 : 무상(無相)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보리심으로 인과(因果)를 깊이 믿고 선각자들의 어록에 입각한 삶을 지향하며 남에게도 이 길을 권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킨다.
이렇게 공덕이 가득 쌓인 마음 밭에는 참 인연(因緣)의 씨앗이 닿게 된다. 순연한 삶은 불(佛)씨를 받을 준비가 완료되었을 뿐 아니라, 씨를 받아 잉태하려는 바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공덕은 죽은 알음알이를 쌓는 것이 아니다. 공덕은 삶 속에서 삶의 한 부분으로 나와 함께 끊임없이 성숙하며, 자신을 존재의 실상과 원만히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
다. 무심(無心)한 마음으로
'존재의 실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즉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경험에 당황하며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서는 내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실상이 드러날 때 내 육체는 사라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모든 인간의 본질은 본래 비형상적(formless)인 모습이기 때문이다(諸法無我). 존재의 실상이 나를 관통하고 있을 때 이제 더 이상 유위(有爲)가 실상의 구실을 대신하지 못한다. 유위(有爲)가 사라졌을 때, 나는 우주가 된다. 비형상의 형상(formless form), 무한(無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상은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실상은 결코 미래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지금 그리고 여기' 바로 내 마음이다. 그러므로 실상이란 창조되는 것도, 발명되는 것도, 또한 찾아지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실상관법이 쉽게 그리고 진솔하게 이해될 수 있다.
마음은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마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욕망 속에 있다. 마음은 현재에 관심을 두지 않고 미래의 그 어떤 목표만을 겨냥하고 있다. 실상은 현재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과거 아니면 미래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마음과 실상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마음이 세속적인 목표를 겨냥할 때 이를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실상을 겨냥할 때는 이를 보기 위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빗나가게 된다. 실상은 지금 여기인데 마음은 늘 저기(未來나 過去)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상을 만날 수는 있어도 실상,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찾는 노력에 의해서 시각(視覺)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실상을 찾을 때 우리는 현재로부터, 지금 여기 이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그것은 '찾은 자(실상)'는 현재에 있고, '찾는 행위(마음)'는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우리가 찾는 것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찾게 되면 잃을 것이다. 그러나 찾지 않을 때 만날 것이다'. 실상관법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부터 현재로 돌리는 방법이다. 즉 실상관법은 마음을 찾는 상태로부터 찾지 않는 상태(non-seeking)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실상관은 알고 모르고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헛된 지각(妄念)이고,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지각도 없는 무기(無記)에 속한다. 만약 지금 여기 이 마음으로 무심(無心)에 이른다면 허공처럼 탁 트여서 한없이 넓을 것이니 구태여 애써 '실상이다, 실상이 아니다'라고 할 것도 없다.
라. 실상관(實像觀)은 순수의 빛으로 해탈에 이르는 正門
우리의 몸인 사대(四大)를 비롯하여 모든 형상[色]은 연기하는 인연화합물이며 태초에 일기(一氣)에서 벌어진 것이다. 지금의 모든 色[형상]은 항상하지 않다. 牛谷의 실상관(實像觀)은 존재의 근본에너지인 빛을 방편으로 모든 번뇌의 괴로움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고 지혜의 바탕인 자비성품이 깃드는 위없는 심신(心身)수행 법(法)이다.
실상관법(實像觀法)은 논리나 알음알이로 다가서는 교법이 아니다. 삼라만상과 원만히 상통하는 가장 높은 참 선법(禪法)으로서 근기에 따라 관(觀)을 달리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선지식에 의한 관(觀) 수행법을 전수 받고 때에 따라 경계 점검을 하여야 만이 수행 중에 생겨나는 상기현상 등의 휴유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