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깨달음의 正路
◇ 깨달음은 '나'라고 인식하던 五蘊의 벽을 뛰어넘어 삼라만상과 通해지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상대에 물들지 않는 中道이며 영원한 자유로의 출발입니다. 땅을 기는 칡넝쿨도 곧은 소나무와 함께 하면 하늘로 치켜 오르고, 흰모래도 검은 진흙에 섞여들면 쉬 검어집니다.
◇ 깨침은 변방의 시비로부터 자유스러워 지는 것일 뿐 부처에 맛들이고 조사에 현혹되어 또 다른 이상을 모색하는 것이 아닙니다. 眞理라는 言語의 現示에 길들어지거나 幻想으로 지은 것을 깨침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外道이며 魔에 빠져든 것입니다. 또한 參究함에 있어서 경전이나 어록을 통하여 진리를 이해하려 들면 내 안에 꼬리가 열 두개인 불여우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 眞理의 체득[깨달음]은 소낙비에 온몸을 흠뻑 적시 듯 成住壞空하고 生住異滅하는 순리에 빠져 죽을 일 밖에는 달리 신통 묘수가 없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여기 사바세계를 살다간 선각자들도 公力의 시절인연[졸啄同時]을 만나 정도의 길을 걸어갔으며 미래에 올 覺者도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반드시 걷게 될 것입니다.
◇ 깨우침의 방법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석존이 가섭에게 傳한 涅槃妙心과 修證으로 점차 다가가는 길 등이 있습니다. 禪 수행을 올바로 할 경우 구도자 대부분은 차츰 보고 듣는 경계가 분명해 지는 識見이 열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識見은 닦을 수록 無心한 지혜와는 차등이 있어 선지식의 점검과 보림(保任)이 없으면 다시 識이 어두워집니다. 완전한 깨우침에 도달되기 위해서는 수증으로 證得한 功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無心을 길러야 합니다.
◇ 깨우침의 化身인 智慧는 禪定의 장작더미에 타오르는 불꽃이며 無念의 텃밭을 조성하는 힘입니다. 깨달음과 道를 말하는 세간의 뭇 수행상은 대상에 빌고 구하여 수기를 받았다거나 고행과 특이한 방편을 앞세운 명상을 통하여 깨우쳤다고 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識을 놀라게 하여 과거 기억을 잠시 잠재운 것이거나 幻을 접수한 종의 모습으로 거듭난 것에 불과 합니다. 正覺은 부처나 조사 등 그 어떤 상도 앞세우지 않으며 작위 또한 없습니다. 단지 '나'를 버리고 자연의 섭리에 귀의하는 혹독한 인고의 순간 순간들이 있을 뿐입니다.
◇ 大悟는 화산이 폭발하듯 한 경계가 있습니다. 살갗이 터질 듯하고 뼈속이 저리는 공포와 고통, 위협과 타협, 그리고 부와 권세, 속세의 염원인 낙원을 펼쳐 보여 주는 등의 유혹으로 無心으로 가려는 自性을 방해합니다. 이때 세세간에 지어놓은 자비공덕의 힘인 無心으로 유위상을 초월하여 절대 세계인 無念에 이르게 되는 것이 大覺의 정수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학습이나 修證으로 다가갈 수 없으며 空으로도 아니 됩니다. 그리고 覺者는 절대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새로운 業에 묶임을 당합니다.
◇ 求道는 佛緣이 닿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며 방편인 것입니다. 開悟 즉, 모든 覺은 인연으로부터 불씨를 옮겨 받는 수순을 밟습니다. 깨우침은 시절 따라 至福이 발현하는 것으로서 無明에서 벗어나 마음을 밝히는 full energy의 씨앗을 확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올바로 이해할 때 깨달음이라는 미명아래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해탈의 길에서 마주쳐야 하는 참담한 운명의 단절을 겪지 않습니다.
◇ 頓悟의 순간은 중생상으로부터 잠시 맛본 無心의 토막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영원한 자유세계인 中道를 성립시킬 때 까지는 타는 듯한 인고를 요구합니다. 머무름 없는 용맹심으로 길없는 길을 헤쳐 正覺에 이르지 못하면 십지보살도 다시 떨어져 어두워지는 것이 해탈의 門으로 들어서는 절대 조건입니다.
◇ 道는 닦아서 따로 세울 곳이 없듯 깨달음은 平常心을 되찾는 것뿐입니다. 平常心은 저자거리 삶으로서 조작과 시비가 없는 日常이며 단상과 취사가 없으며 범부와 성인을 나누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