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수행의 본질 

 

1. 修行은 만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열어가는 過程입니다.

가. 我執으로 부터의 解放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의 생김새를 서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
- 귀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는 부채와 같다
- 배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
- 코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는 뱀과 같다라고 각자가 만져본 코끼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서로 싸웠습니다

기둥도 부채도 벽도 뱀도 아집이며 자기 주장일 뿐입니다. 눈을 뜨고 코끼리를 보지 않으면 코끼리의 본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나. 相對的 價値로 부터의 解放

- 조선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는데 현재는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 신라시대에는 4촌 이상이면 결혼할 수 있었는데 조선시대부터는 동성동본이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합니다.

- 아랍국가에서는 일부 다처가 지금도 허용되고 있습니다.

- 일본에서는 사촌 이상이면 결혼이 허용됩니다.

- 백년 전만 하더라도 이 땅에서는 남편이 먼저 죽으면 부인이 큰 죄인이 되어 未亡人으로 불려지고 재혼을 하면 죄인 중의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 조선시대에는 남편은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었지만 여자는 남편이 죽어도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善과 惡의 기준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과연 善과 惡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기준이고 약속입니까?

다. 無知로 부터의 解放

- 한 농부가 습기가 많은 땅에는 감자를 심고, 건조한 땅에는 벼를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감자는 썩어 버렸고, 벼는 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 농부는 神에게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神이여 부디 감자를 심은 땅에는 물이 잘 빠지게 하여 주시고,벼를 심은 땅에는 비를 내려 주소서!!!

- 그러나 가없는 神은 농부에게 습한 땅이 건조하게, 건조한 땅이 습하게 되는 기적을 내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 땅이 뒤바뀌는 기적 없이도 감자와 벼의 성질에 따라 습한 땅에는 벼를 심고, 건조한 땅에는 감자를 심으면, 神의 힘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즉시 풍년을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 살이가 어리석음 하나 때문에 오늘도 고통의 연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행동은 無知하지 않고 賢明하여야 합니다.

라. 나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나’입니까? 이 육신은 아닌 것 같으니, 그럼 마음입니까? 마음은 수시로 變하고 있으니, 과연 어느 것이 不變하는 나입니까? 나의 가치관, 부모, 형제, 친구, 재산, 직업 등 나를 규정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곳에서 자랐다면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라고 인식되어지는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즉 주체적인 내가 아니라 수동적인 ‘나’인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의 모임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거짓 나’를 ‘참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나’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수행은 시작됩니다.

마. 무엇이 잘못된 이해인가?

현생을 살아오면서 육근의 감각기능을 통해 익혀온 훈습을 진리로 착각하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고정 불변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이 잘못된 이해입니다.
자석이 종이 위에 놓인 모든 쇳가루를 자기를 中心으로 배열시키듯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自己 또는 神을 中心으로 하여 정돈하려고 하는 생각이 잘못된 이해입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自然의 攝理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생활관습에 묶여 있는 생각이 잘못된 이해입니다.

바. 무엇이 올바른 이해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끝없이 변해간다는 사실(諸行無常)을 완전하게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입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 중에 불변하는 주체는 없으며(諸法無我) 그 변화의 원동력은 神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인 因果의 결과에 따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완전하게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입니다.

콩 심은 밭에서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밭에서는 팥이 납니다, 콩 심은 밭에서 팥을 기대하는 것은 無知의 소치입니다.

사. 올바른 이해의 SAMPLE

- A에 서 있는 사람을 목적지에 인도하기 위해서는‘동쪽으로 가라’고 해야 합니다!
- B에 서 있는 사람을 목적지에 인도하기 위해서는 ‘동북쪽으로 가라’고 해야 합니다!
- C에 서 있는 사람을 목적지에 인도하기 위해서는‘북쪽으로 가라’고 해야 합니다!
- 그럼 올바른 이해는 무엇입니까?

 

어느 한 주장에도 묶여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수용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가 닿는 ‘정함이 있음이 없는 것’이 곧 올바른 이해이며 正道입니다.

2. 修行은 올바로 이해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하는 過程입니다.

경험과 학문적 논거로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있으나 분별심을 내려놓은 이후의 경계인 기민하고 당당한 힘이 길러지지 않으면 오히려 안다는 것은 질곡이 되며 분명한 行을 지어 가는데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됩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만상이 너부러져 있어도 나에게 그 이치를 바로 行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합니다.

참 禪 수행은 바른 힘을 길러 삼라만상을 나의 밥상 위에 올려놓는데 있습니다. 참 禪 수행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 한 생각에 생체 에너지가 묶임을 당하거나 그 생각을 붙잡고 있는 보편적인 중생상을 놓아도 일상에서 전혀 손해가 없다는 절대적 확신을 키워 가는 과정입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생명력 있음을 확인해 주는 호흡 間의 에너지 작용입니다. 대 자유는 생각에 묶임을 당하지 않는 능동적인 마음 되어짐을 칭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다스림에 있어 호흡 즉, 들숨과 날숨간에 일어나는 잡다한 생각에너지를 뇌 세포에만 묶어두지 않고 자신의 육신 구석구석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기능적 방법이 참 禪 수행의 기본 이치입니다.

참 禪 수행은 오로지 끄달림 없는 그 마음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수행자 자신이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올바로 알아야 하고, 이해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으로 내면의 힘을 길러 분별의 벽을 무너뜨려야 하므로 우리는 선각자의 어록을 빌고 선지식과 인연을 지어 내 수행의 등불로 삼으며 계행의 실천으로 공덕을 쌓아 각자의 시절 인연을 당길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결연한 의지로 통찰의 힘이 증장되어 黑과 白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때 수행자의 삶은 비로소 끄달림 없는 삶으로 반전되어 갑니다.

가. 一念의 훈련

지식적인 이해를 통하여 자기의 말과 행동을 일시적으로는 통제할 수 있지만, 탐욕과 어리석음 등의 건전하지 못한 마음이 들끓고 있는 한 얼마지 않아 곧 생각과 행동은 따로 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수행자는 마음을 견고하고 안정되게 강화시키는 훈련 즉 하나의 대상, 마음에 一念으로 집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수행자는 자신의 미묘한 성품인 마음을 검사하는 도구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부처님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一念으로 向하게 하는 여러가지 수행법을 고안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내적 행동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좌선과 호흡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 禪定의 체험

만약 수행자가 부지런히 좌선 수행을 이어간다면 여러 가지 경계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수행자는 신체를 통하여 일어났다 재빠르게 사라지곤 하는 미세한 기혈의 흐름을 자각하게 되고 나아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미세한 흐름을 인식하게 됩니다 즉 계속 일어났다 사라지는 소립자들의 덧없는 본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수행자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혈액, 뼈, 액체, 고체, 가스 등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관계없이 오직 밝음과 떨림의 덩어리 즉 빛의 파동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분별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멈추고 물질의 궁극적인 진리,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흐름 즉 存在의 實像을 직접 경험하게 되며 나아가 모든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다. 三身佛의 작용

의심하는 마음이 모두 없어지고 자연의 이치 즉 근본을 확연히 알게 되면 나의 주장과 집착을 놓고 버려도 결코 두렵거나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주장과 집착에 묶여 있는 마음이 엷어지고 인연이 닿으면 정체된 자신의 생체에너지를 스스로 회전시킬 수 있는 생체에너지 운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三身佛의 작용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생체에너지의 회전이 가능하면 육근에 묶여있는 정신에너지가 차츰 맑아지면서 자기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므로 이해한 바를 언제나 즉시 실천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수행자들이 참 禪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修行은 만상을 수용하면서 걸림없이 살아가는 삶의 過程입니다.

수행의 본질은 물과 같은 성품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의 크기는 삼라만상을 수용하고도 大洋만큼의 여유를 가지는데 있습니다.

大洋의 물은 결코 고요하지 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태산을 집어삼킬 듯 거친 파도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달 그림자 껴안은 듯 고요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의 본성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벽면서생 같은 그러한 깨달음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참 禪 수행은 뱃심을 키워가는 과정입니다.
분별상을 가진 탐착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영원한 자산인 뱃심이 담길 마음 그릇을 새롭게 조성해 가는 과정이 곧 참 禪 수행이며 그 참 禪 수행은 일상에서 行해지고 또 모색되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禪知者 인연이 닿을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禪을 일상화시키는 첩경입니다. 깨달음은 부처 以前에 가장 진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가.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올곧은 수행자에겐 오직 이 순간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걱정을 끌어다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올곧은 수행자는 定과 慧가 함께 어우러진 마음 즉 一行三昧로 살아갑니다.
올곧은 수행자는 禮와 德을 갖추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의 役割에 충실합니다.
올곧은 수행자는 모든 境界를 수용하며 萬象과 調和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나. 이 우주와 하나된 삶을 살아갑니다

올곧은 수행자는 생체에너지가 均衡을 이루어 中心잡힌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올곧은 수행자는 나다하는 소아적인 것들이 부서지고 우리가 되어 하나로 드러나는 모습 즉 八正道에 따라 살아갑니다.

4. 오늘의 Key Word

도포 입고 수염 기르고 지팡이 짚은 모습을 가지고 타인을 현혹시키는 행위에 수행의 본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이한 모습을 주장하는 것은 낭비가 되고 그 또한 相이 됩니다. 수행은 보편 타당한 행위와 平常心에 바탕을 둔 순수한 行이자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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