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백장록(百丈錄)
[Ⅲ]
광 록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가 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만, 타려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바람·물 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먹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적(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탐·진·치는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이 바로 무상(無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악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 에워싸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또한 '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악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다."
어찌 단박에 깨치려 하는가. 사람[人]과 법(法)을 동시에
딱 끊어 비우고[空], 3구(三句: 初善, 中善, 後善) 밖으로 꿰뚫어야 하니, 그것을
'온갖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믿음이며, '법'이란
계율·보시·지혜(聞慧) 등이다. 보살은 차마 성불하지 않고 차마 중생이 되지도
않으며, 차마 계율을 지니지도 않고 차마 파계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지(智)는 흐리고 관조[照]는 맑으며, 혜(慧)는 맑고, 식(識)은 탁하다. 부처로 말하자면
관조하는 지혜[照慧]라고 하며, 보살이면 지(智)라 하고, 이승과 중생 쪽으로 치면
식(識) 또는 번뇌라고 한다.
부처라는 결과 속에는 중생이라는 원인이 들어 있고 중생 원인 속에도 부처라는 결과가
들어 있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법륜을 굴린다[轉法輪]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법륜이
구른다[法論轉]하며, 보살에 있어서는 영락장엄구(纓珞莊嚴具)라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오음총림(五陰叢林)이라 한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본지무명(本地無明)이라 하는데, 이는
무명의 밝음[無明明]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도의 바탕이 된다'하였으니, 어둡게
가리운 중생의 무명과는 다르다. 저것[彼]은 객관이고 이것[此]은 주관이며, 저것은
들리는 것[所聞]이고 이것은 듣는 것[能聞]이다.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아주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살아 있는 말[生語句]이며, 틀을 벗어난 말[出轍語句]로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니 다 이와 같다.
온다 간다, 단멸이다 영원하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두루하다
두루하지 않다, 같다 다르다, 단멸이다 항상하다 하는 등은 외도의 설이다. 반야바라밀은
자기 불성인데 마하연(摩詞衍)이라고도 한다. 마하(摩詞)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수레[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기의 지각(知覺)을 지켜 머물면 또한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된다. 비추어
깨달음[鑑覺]을 달리 지킬 필요가 없으며, 따로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따로 구한다면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떨어진다.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다 할
것도 있게 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에 혹하게 되니, 믿으면
믿는데 혹하고 믿지 않으면 비방을 이룬다. 그러므로 귀하다 귀하지 않다 하지 말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도 말라.
부처님은 무위(無爲)도 아니다. 무위가 아니라 해서 허공과 같은 적막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허공같이 큰 마음을 가진 중생[大心衆生]으로서 비추어 깨달음이 많다.
비록 많다고는 하나 그 비추어 깨달음은 청정하여 탐내고 성내는 귀신이 그를 붙들지
못한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를 벗어난 분으로 털끝만큼의 애욕과 집착이 없으며, 애욕과 집착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이를 6도만행(六度萬行)을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법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으로는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색(色)이 없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것이 아니며, 망정이 없으므로 천안(天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색(色)은 색이나 형색(形色)이 아님을 진색(眞色)이라 하며,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卽)했다느니 색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1
누군가 백장스님께 묻기를, "보십니까?"
"본다."
다시 물었다.
"본 뒤에 어떻습니까?"
그러자 백장스님은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냐. 마치 '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授記]을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기약[授記]을 주신다는 말이 어떻게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백장스님은 "먼저 종지[宗]부터 깨달은 사람은 빨아놓은 옷처럼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상(法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 떠난 것을 '부처'라 하는 것이다.
허와 실을 둘 다 간직하지 않고 중도만이 오롯하고 묘하다. 한 가닥 같은 이 길을
통달하여 후진들이 그 단계에 계합하므로 '기약을 준다'고 할뿐이다.
무명(無明)은 아버지이고 탐애(貪愛)는 어머니이며, 자기는
병이고 다시 자기를 치료함은 약이다. 자기라는 칼로 다시 자기 무명과 탐애라는
부모를 죽이므로 '부모를 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일체법을 견주어
타파하니, 때 아닌 때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은 때 아닌 밥이며, 나쁜 음식이며 보배 그릇에 담긴
더러운 음식이다. 또한 파계이며, 망령된 말이며, 잡스러운 음식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탐하여 소유하거나 조작하면
모두가 위배되는 것으로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하고 물들면
그것을 모조리 '수수(授手)'라고 이름한다. 탐내거나 물들지 않고, 탐내거나 물들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면 반야화(般若火)라 한다.
이것은 손가락을 태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사지를 마디마디 찢고, 세간을 벗어나며
저 세계에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오장육부에 12분교와 유·무 등 모든 법을 털끝만큼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한다. 이제 오장육부에 아무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대시주(大施主)이며 사자후이다. 이 사람은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육절사자(六絶獅子)라고 부른다.
大乘入道頓悟法要(대승입도돈오법요)
1
"무엇이 대승도에 들어가 활짝 깨치는 요법입니까(大乘入道頓悟法要)?"
백장스님이 말씀하기를, "무엇보다도 그대는 모든 인연을 쉬고 만사를 그만
두라. 선(善)·불선(不善)·세간·출세간, 일체 모든 법을 다 놓아 버리고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곳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모든 인연을 쉬어 탐애와 성냄과 집착,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면 5욕8풍(五欲八風)이 닥쳐도 꿈쩍하지 않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히지 않고 모든 법에 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갖가지 공덕과 신통묘용(神通妙用)을 갖춘 해탈인이니,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다툼과 혼란이 없다. 거두지도 않고 흩지도 않은 채 성색을 꿰뚫어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는 것이다. 선악·시비 그 어느 것도 쓰지 않으며, 한 법도 애착하지 않고, 한 법도 버리지 않으니 이를 대승인(大乘人)이라 한다.
모든 선악, 공유(空有), 더럽고 깨끗함,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복이니 지혜니 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美醜), 옳은 이치다 그른 이치다 하는 온갖 알음알이[知解]와 망정이 다하면 얽어맬 수 없어서, 어딜 가나 자유로우니, 이를 초발심 보살이 그대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다."
大乘入道頓悟法(대승입도돈오법)
1
"무엇이 도에 들어 활짝 깨닫는 대승법[大乘入道頓悟法]입니까?"
백장선사께서 대답했다.
"우선 그대는 모든 반연을 쉬고 만사를 쉬어서 착한 일, 착하지 못한 일 등
세간의 온갖 것들을 모두 놓아버린 뒤에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 몸과
마음을 놔버려 자유롭게 하면, 마음은 목석(木石)같이 되고 입으로는 말할 것이 없고
마음으로는 분별할 길이 없어진다. 마음은 허공 같아 지혜의 해가 저절로 나타나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나듯 할 것이다. 온갖 반연인 탐욕·성냄·애착 등을
모두 쉬어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생각이 다하여 5욕(五欲)과 8풍(八風)을 대하더라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러한 속박을 받지 않으며,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신통과 묘용[神通妙用]을 갖출 것이니 이는 해탈한 사람이다. 온갖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조용함도 어지러움도 없고 거둘 것도 흩어버릴 것도 없어서 온갖
빛과 소리를 만나더라도 걸림이 없으면 이런 이를 도인(道人)이라 한다. 온갖 선악(善惡)과
더럽고 깨끗함, 유위(有爲)세계의 복과 지혜에 얽매이지만 않으면 그것을 부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美醜), 옳은 이치나 그른 이치 등 모든 소견을 다 없애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어딜 가나 자유로우면 그것을 처음 발심한 보살이 당장에 부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모든 법은 스스로가 말하지 않아서, 공(空)도 스스로를 공이라 하지 않고 색(色)도
스스로를 색이라 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더럽고 깨끗함도 사람을 속박할 생각이
없는데, 사람들 스스로 함부로 헤아리고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고 갖가지 소견을
일으킨다. 그런데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다하여 얽매임에도 머무르지 않고
해탈에도 머무르지 않아서 온갖 유위 무위의 견해가 없이 평등한 마음씨로 생사에
처한다면 그 마음은 자유로울 것이다. 마침내는 헛된 번뇌와 5온·18계·생사와 모든
감관과 어우르지 않고 훤출히 뛰어나 의지한 곳이 없을 것이다.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아서 가고 옴에 자유로우니, 생사의 길에 왕래하되 마치 문을 여닫는 듯할 것이다.
만일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이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나더라도 물러서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명예나 의식(衣食) 등의 이익을 생각지도
말고, 온갖 공덕이나 이익 등을 탐내지도 말며, 세상 법에 마음을 걸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친하고 좋아하며 괴롭고 즐거운 것이라도 생각에 두지 말며, 거친 음식으로
목숨을 잇고 옷을 입되 추위와 더위를 막을 뿐, 우뚝하니 바보 같고 귀머거리 같이
되어야 비로소 조그마치 가까워질 여지가 있다. 생사(生死)의 길에서는 알음알이를
널리 배우거나 복과 지혜를 구하여도 진리에는 이익이 없고, 도리어 알음알이의 경계가
일으키는 바람에 휘말려 생사바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부처는 구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진리는 구할 것이 없는
이치니 구하면 잃는다. 그렇다고 구함이 없는 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구하는 것과
같다.
이 법은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으니, 만일 평생 동안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아서
5음·18계·5욕·8풍에 흔들리지 않으면 생사의 원인이 끊어져서 가고 옴에 자유로와
모든 유위(有爲)의 인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후일 속박없는 몸으로 중생과
동화되어 그들을 이익 되게 하고, 속박 없는 마음으로 모든 것에 응하며, 걸림없는
지혜로 중생의 모든 속박을 풀며, 병에 따라 약을 줄 것이다."
2
어떤 스님이 울면서 백장스님께 묻기를,
"어째서 그러느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스님께서 장사지낼 날을 잡아 주십시오."
"우선 돌아갔다가 내일 오너라. 한꺼번에 묻어주겠다."
3
위산(위山)스님이 밤늦게 백장스님을 뵈러 왔는데 백장스님은 위산을 보자마자 말했다.
"화로에 불을 좀 지펴다오."
"불씨가 없습니다."
"아까 불씨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고 벌떡 일어나 화롯가로 가서 손수 재를 헤쳐 불씨 한덩이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산스님은 당장에 깨달았다.
4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아무개라 합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분명합니다."
스님께서 불자(拂子)를 세워 들고 말했다.
"그대는 이 불자를 보는가?"
"봅니다."
스님께서 문득 말을 그쳤다.
5
어떤 이가 물었다.
"지금 계를 받아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고 온갖 착한 법을 다 갖추면 해탈을
얻겠습니까?"
"조금은 해탈을 할 수 있으나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면 온갖 해탈을 얻지는
못한다."
"무엇이 마음의 해탈입니까?"
"부처도 구하지 않고, 알음알이도 구하지 않아서 더럽고 깨끗한 생각이 다한
뒤엔 이 구함없는 경지도 옳다고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다한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고, 지옥의 속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당의 즐거움도 좋아하지 않고, 일체 법에
구애되지 않아야 비로소 해탈하여 걸림이 없게 될 것이니 몸과 마음 등 모두를 해탈이라
하게 된다.
그대들은 조그마한 계행이나 선행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지 말라. 항하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무루(無漏)의 계·정·혜를 가졌다 하더라도 전혀 쓸모가 없으니 용맹정진에
진력을 다하라.
귀 먹고 눈 어두운 늙음의 고통이 몸에 다가올 때까지를
기다리지 말라.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은 두려움에 떨면 갈곳이 없으니 이
지경이 되면 손발을 쓰려 해도 소용이 없다.
설사 복과 지혜와 지식이 있다 하여도 전혀 구제할 수 없는데, 그것은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하고 오직 모든 경계를 반연하여 돌이킬 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일생 동안의
악업(惡業)이 모두 앞에 나타나서 반갑거나 두려운 6도와 5온이 앞에 나타나면 모두가
훌륭한 집·배·수레로 보여서 찬란히 빛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탐욕과 애착을
따랐기에 모두 좋은 경계로 보이는데, 보이는 데 따라서 인연 많은 곳으로 태어나니
전혀 자유가 없어 용이 될지 축생이 될지 양반이 될지 상놈이 될지 전혀 기약이 없다."
"어찌해야 자유로워집니까?"
"이제 5욕과 8풍을 대하여도 마음에 버리거나 선택함이 없고, 더럽거나 깨끗함이
모두 없어져서 하늘의 해와 달이 아무 것에도 걸리지 않고 비추는 것같이 되어, 마음이
목석(木石)과 같고 강을 건너는 코끼리같이 전혀 의심이 없으면 이 사람은 천당이나
지옥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6
또 백장스님은, "경을 읽거나 서적과 어록을 보는 목적은 모두가 자기에게로
돌아가야 된다.
온갖 교법은 오직 현재 감각하는 성품인 자기를 밝히는 것이라야 하는데, 유무(有無)의
모든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導師]께서도 온갖
유무의 경계를 꿰뚫어 무찌르셨으니, 이것이 '금강경'의 자유와 독립의 경지이다.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설사 12부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이루게 될 것이며, 도리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어 수행도 아니고 경이나 어록을
보는 것도 아니다.
만일 세상이 좋은 일 뿐이라 하거나 밝은 사람 쪽으로만 향한다면 이는 옹색한 사람이다.
10지에서도 세상의 흐름을 해탈치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지식으로
어구(語句)를 찾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된다. 지식은 탐욕에 속하고, 탐욕은 병을
이루니, 지금이라도 유무 모든 법을 여의어 3구(三句) 밖으로 뛰어나면 자연히 부처님과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스스로가 부처인데 어찌 부처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근심하랴. 오직 부처가 유무 등 모든 법에 얽매여 더욱더욱 부자유스럽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진리의 바탕 위에 서지 못한 채 복과 지혜가
있는 것은 마치 천한 이를 귀하다 하는 것 같으니, 진리의 바탕에 먼저 선 뒤에 복과
지혜가 있어서 때에 맞추어 행동하느니만 못하다. 그렇게 되면 흙을 가지고 금을
만들고 바닷물을 시냇물로 바꾸며, 수미산을 뭉개어 먼지를 만들며, 한 이치를 무량한
이치로 하고 무량한 이치를 한 이치로 하게 될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다'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은 깨달음 얻기 전의 사람과 달라진 것이 아니라 깨닫기 이전의 생각과 행동이 다를 뿐이다. 한 생각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定)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一切佛)이 일체색(一切色)이고, 일체진(一切塵)이 곧 일체불(一切佛)이다. 또한 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한 이치를 통달한 것이 삼매정(三昧定)임을 요해(了解)하는 것으로 백장(百丈)의 장서(藏書)를 해제(解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