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승보찬과 두타행

 

1. 僧寶讚

당(唐)나라 승전(僧傳)에 의하면 덕종(德宗:779∼805)이 담광(壘光)법사에게 물었다.
승(僧)을 어째서 보배라 합니까?

담광법사가 대답하였다.
승(僧)을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그 모두가 보배입니다.
첫   째 : 스스로의 마음을 단박에 깨쳐서[頓悟]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분을 선승(禪僧)이라 하며,
둘   째 : 이해[解悟]와 실천[修行]을 동시에 행하여 세간 흐름에 들어가지 않은 분을 고승(高僧)이라 하며,
셋   째 : 계(戒)·정(定)·혜(慧)를 고루 갖추어 설법솜씨가 뛰어난 분을 강승(講僧)이라 합니다.
넷   째 : 견문이 깊고 알차서 옛일로 지금의 문제를 정립시키는 분을 문장승(文章僧)이라 하며,
다섯째 : 인과(因果)를 알고 자비와 위엄을 함께 쓰는 분을 주사승(主事僧)이라 하며,
여섯째 :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여 부처종자를 기르는 분을 상승(常僧)이라 합니다.
이 말에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마침내 천하에 조서를 내려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2. 頭陀行

좌계존자(左溪尊者)의 법명은 현랑(玄朗: 673∼754,천태종 제5조)이며 오상(鳥傷)사람이다. 천궁사(天宮寺) 혜위(慧威)법사에게 불법을 배워 종지를 얻고 바위산 골짜기에 숨어 살았다. 그는 비구에게 필요한 소도구만 가지고 30년 동안 12두타(十二頭陀)를 행하면서 세세한 수행과 몸가짐까지도 모두 계율을 따랐다. 원숭이가 열매를 따 가지고 와서 스님의 발우에 바치기도 하고 날아가던 새가 그의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당나라 문인인 이화(李華)는 현랑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누구에게 선법(禪法)을 전해 준 적도 없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외모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켜 일상에 흠이 없었다.
경을 강의해도 대중이 많기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줄 모르고 학인을 지도했다. 구석진 집에 살면서 두 가지 반찬있는 밥을 먹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할 때 말고는 밤에 등불을 밝히지 않았고 낮에도 부처님 상호를 우러러 예불할 때 말고는 한 발짝도 쓸데없이 걷지 않았다. 가사 한 벌로 40년을 지냈고 한 장 방석은 죽을 때까지 갈지 않았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한마디도 법문한 적이 없고 터럭만큼도 불법(佛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받은 일이 없는 분이다."

두타행(頭陀行)이란?

두타(頭陀)는 의, 식, 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는 뜻이며 혹은 번뇌를 털어 버린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두타의 생활규범은 12가지 조항이 있어 십이두타행(十二頭陀行)이라고도 한다.

  1)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곳에 머무는 재아란야처(在阿蘭若處)
  2) 항상 걸식하는 상행걸식(常行乞食)
  3) 걸식을 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하는 차제걸식(次第乞食)
  4) 하루 한끼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
  5) 과식하지 않는 절양식(節量食)
  6) 중식이 지난 정오 후에는 과실즙 설탕 따위도 먹지 않는다.
  7) 헤지고 헐은 감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8) 삼의(상의, 중의, 하의)의 옷 이외에는 소유하지 말 것
  9) 무덤 곁에 머물면서 무상관(無常觀)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
  10) 주거에 대한 애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무 밑에 산다.
  11) 한 데나 비어 있는 땅에 앉지 말 것
  12)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는 것이 두타행이다.

후세에 이르러 두타는 온갖 고행을 일삼는 수행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혹은 불도를 행하는 승려들의 걸식 행각을 두타행 이라고도 말한다.

 

목선암(木禪庵) 선사


1. 僧寶讚

법진 선사(法眞 禪師 834∼919)는 신주 사람으로 염정왕씨(鹽享王氏) 자손이며 벼슬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숙세 인연을 깨닫고 뜻을 세워 스승을 찾아 나섰다. 중원 남쪽으로 내려와 약산도오(藥山道吾)선사와 대위산(大위山) 영우(靈祐)선사를 찾아 뵙고 대중 속에서 열심히 살았다.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잠자리도 없으면서 맑은 고행과 철저한 수행상은 실천과 지조가 남달라 보였다. 하루는 영우 선사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곳에 와서 왜 한 마디 법도 묻지 않는가?”
"무엇에다 입을 열어야 하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무엇이 부처냐고 묻지 그러느냐 ?"
이때 법진이 손으로 대위선사의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대위선사는 "그대는 참으로 도의 진수(眞髓)를 얻었구나"하고 감탄하였다.

그후 서촉(西蜀)으로 돌아가 도수(도水)가에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차를 끓여주곤 하면서 3년을 지냈다. 그러다가 뒷산에 올라가 우연히 절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름을 대수사(大隨寺)라 하였다. 그 산에는 둘레가 네 길이나 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남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어 도끼나 칼을 빌리지 않고도 그대로가 암자였다. 선사가 이곳에 살게 되니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글자 그대로 목선암(木禪庵)이라 불렀다.

십여 년을 혼자 목선암에 기거하니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촉왕(蜀王)이 세 번이나 그를 불렀으나 들어주지 않으니 왕은 선사의 고고한 도풍을 우러러볼 뿐 한번 만나볼 길이 없었다. 내시를 보내 스님에게 호와 시주물을 하사하였지만 받지 않았고 무려 세 번을 보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촉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면서 칙명을 내려 이번에도 전처럼 받지 않는다면 그대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내시는 엎드려 절하면서 "스님께서 왕의 명을 받지 않으면 제가 죽습니다"라고 말하니 선사는 그때서야 촉왕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법진선사(法眞禪師)가 대중에게 설법(說法)하기를
나는 명리를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얻고자 할 뿐이다. 백운청산[世間事] 속에서 시비를 쫓지 말지니 업보로 받은 이 몸을 벗어버리면 풀 한 포기도 먹지 못할 것이다. 선승들이여, 내가 행각할 때에 여러 총림에 가보면 많게는 천명 적게는 2백 대중이 있었다. 그곳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보냈으나 깨닫지 못하고 공연히 시간만 보내다가 위산스님 회중에 가서 7년 동안 밥을 짓고 동산(洞山)스님 회중에서 3년 동안 나무만 했다. 그 때 나를 중하게 대하는 곳이 있으면 얼른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이 깨달을 생각만 했을 뿐 다른 일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불보살 같은 분들도 모두 오랜 세월을 각고해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였는데 오늘날의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각고하였기에 "나는 출세간 법을 깨달았노라"고 말하는가.

세간법도 아직 깨닫지 못한 처지에 조그마한 경계라도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어쩔 줄을 모르니 무슨 해탈 법을 설하겠는가? 길다란 선상에 앉아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주 시주물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내가 수행한 영험이 이와 같다"하니 이는 자기를 속일 뿐 아니라 모든 부처님까지도 속이는 짓이다.
가사를 걸쳤으면 선지식을 가까이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해야지 또 다시 六道 輪廻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재한 경지를 얻은 사람은 무슨 화탕지옥 노탕지옥에 들어가느니 혹은 말 뱃속과 당나귀 뱃속에 들어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생사문제를 해결한 경지는 맛난 음식을 먹는 것과 같겠지만 아직 이러한 경지를 얻지 못했다면 떠드는 말에 관계없이 윤회과보를 면키 어렵다.

한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다시 오늘같이 인간에 태어나는 일이 만에 하나도 어려운 일이다. 듣지 못했는가. 옛 선사가 묻기를 "무슨 일이 가장 괴로운 일이냐"라고 물으니 "지옥업보를 받는 일이 가장 고통스런 일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그것은 아직 고통이라 할 수 없다. 出家하여 道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라고 하여 수행의 본분사를 일깨워 주었다.

 

회향(廻向)공덕(功德)


佛法은 정연한 事理와 원대한 理致를 담은 지고한 哲學세계이다. 그러나 현실에 계합되는 구체적 실천 행이 없다면 佛敎 가르침은 환상의 세계를 홀로 장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牛谷]

회향(廻向)은 자기가 얻은 정당한 대가나 결실, 또는 수행력(修行力) 마저도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되돌리는 것 즉, 자신이 힘들여 쌓은 공덕을 사바세계로 되돌려 주는 것이며 그러므로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실천적 불교 가르침입니다. 회향의 대상은 깨달음과 중생입니다. 이것은 육바라밀을 실행하는 보살행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보살은 남과 나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살의 궁극적인 삶이 회향(廻向)인 것이며, 존재의 절반을 성취시키는 완성된 깨달음[大覺]은 오직 회향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집니다.

<화엄경>에서 說하는 廻向을 정리하면
"처음 예배하고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을 수순(隨順)하기까지 그 모든 공덕을 온 누리에 있는 일체 중생에게 되돌려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나쁜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일의 문은 닫아 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인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보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다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 없이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토록 힘쓴다.

회향심이 충만한 보살은 대 자비로 중생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활동에 조금도 쉬는 일없으며 또, 보살은 깨달은 마음으로써 온갖 선을 닦고, 일체중생을 위한 지도자가 되어 지혜의 길을 제시하고, 일체중생을 위한 진리의 태양이 되어 온 누리를 비춤으로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선(善)을 행하게 하는데 조금도 쉬는 일이 없다."

보살은 부처님이 설한 최상의 진리를 듣고 마음 속 깊이 새길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중생(衆生)에게 설법(說法)하여 다음과 같이 회향한다.

"저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무수하고 끝없는 세계 속의 모든 부처님들을 바르게 생각하여 보살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세계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해서라도 영원토록 보살의 의무를 다 하겠습니다.
저는 모든 세계 모든 중생을 위해서 영원토록 보살의 의무를 다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회향심(廻向心)은 남의 잘못한 대가를 내가 대신하여 받겠다는 것이며 내가 잘한 일은 남에게 되돌리는 자비심의 극치를 일컫고 있습니다. 즉, 회향은 개인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들여 쌓은 공력(功力)마저도 사바세계 중생(衆生)을 위하여 되돌려 주는 공덕(功德)의 대 전환을 의미하며 그럴 때 비로소 대(大) 자비(慈悲)를 구현하는 길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주상보시행으로서 되돌아올 결과를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헌신과 희생정신이 굳건한 바탕으로 자리 매김 되어진 보살행의 완성이며 이 길만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보현보살이 일체보살과 선재동자에게 說하는 열가지 行願은>
첫   째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둘   째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요
셋   째  널리 공양하는 것이요
넷   째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요
다섯째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이요
여섯째  설법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일곱째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이요
여덟째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요
아홉째  항상 중생을 수순하는 것이요
열   째  지은 바 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가르침과 수행상(修行相)은 반드시 회향(廻向)으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향이 일상화(日常化) 되어있는 마음일 때만이 대자비심이 발로된 보살행이며 그러한 회향 공덕(功德)이 완성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본성으로 자리 매김 되어집니다.

부언하면 세속의 물질적 개념으로 회향의 도리를 이해하려 들면 수행정진에 장애가 생깁니다. 회향은 물질의 유무에 아무 상관없이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른 마음 즉, 온전한 인생의 가치관 정립측면에서 회향의 의미를 헤아릴 때 비로소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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