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임제록(臨濟錄)해제 序說

 

本 牛谷禪院은 辛巳年 初, 임제록 해제에 앞서 세월에 찌든 때를 벗겨내고 재편집하여 본원 참선공부 참조교재로 활용하였다.

임제 의현(臨濟 義玄. 854年 亡)은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서 산동성의 남화 태생이다.
임제(臨濟)는 법호이며 속성은 형(耶)씨다. 당나라 선종때 진주(鎭州)의 임제원(臨濟院)에 주석하였으며 宋· 元· 明代까지 임제의 禪風은 드세었다.

임제록은 宋나라 원풍 8년(1085) 그의 제자 혜연에 의해서 엮어졌으며 선화본은 서문(序文), 상당(上堂), 시중(示衆), 감변(勘辨), 행록(行錄), 탑기(塔記)로 되어 있다. 신라 말 도의스님이 마조의 직제자인 지장에게서 법을 구한 후 임제의 참선법이 알려졌으며 오늘날 한국 禪家는 거의 임제선사의 宗風을 따르고 있다.

임제3구(臨濟三句)

어떤 승려가 임제선사에게 '어떤 것이 진불(眞佛)이고, 진법(眞法)이며, 진도(眞道)입니까? 하니, 임제선사가 이르기를 '佛은 심청정(心淸淨)이며, 法은 심광명(心光明)이고, 道는 처처무애정광(處處無碍淨光)이니라'. 이 셋은 곧 하나로서 이름뿐이고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도인은 잠시라도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온 9년 후 숭산의 동굴에서 혜가를 만나 이전의 불교 공부가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듯이 나의 소견은 부처, 조사와 다르지 않다. 제1구(句)에 깨달으면 불조사(佛祖師)가 될 것이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천사(人天師)가 될 것이고, 제3구에서 깨달으면 제 몸조차 구제할 수 없느니라. 그러자 승려가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제1구 입니까? 하니 삼요(三要)의 도장을 찍어내니 붉은 점이 선명하고[삼요인개주점측(三要印開朱點側)], 생각을 붙이기도 전에 주객이 분명하다[미용의의주빈분(未容擬議主賓分)]. 또 승려가 묻기를 어떤 것이 제2구 입니까? 하자 현묘한 깨달음에 어찌 무착의 질문을 용납하겠으며[묘해기용무착문(妙解豈容無著問)], 방편이 어찌 분별 망상 끊긴 근기를 저버리겠는가?[구화쟁부절류기(구和爭負截流機)] 제3구에서 임제선사는 저 무대 위의 꼭두각시를 보아라[간취붕두롱괴뢰(看取棚頭弄傀儡)]. 꼭두각시가 꼭두놀음을 하는 것은 모두 속에 있는 사람이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에 달려 있다[추견도래이유인(抽牽都來裏有人)]. 또, 말하기를 '종승(宗乘)은 권(權)도 있고 실(實)도 있고, 조(照)도 있고, 용(用)도 있어야 한다. 그대 납자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또 '할(割)'은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과 같고, 때로는 쭈그리고 앉은 사자와 같고, 어떤 '할'은 탐간영초(探竿影草)와 같고, 어떤 '할'은 '할'하는 작용을 하지 않느니라' 이 말에 승려가 머리를 굴리자 임제가 '할' 하였다.

임제선사가 게송으로
머물지 않는 도리를 묻는다면, 참다운 관조는 끝이 없고
모습과 이름을 떠난 것은 본래 성품 없으니
예리한 칼날을 쓰고서 얼른 갈아 두어라.

머물지 않는 법은 끝없는 통찰일 뿐이며
성품은 모습과 이름을 떠나듯
취모검[禪刀]은 들고 남이 자재하다.

1. 示衆 [Ⅰ]

그리고 임제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기를,
"어느 때는 사람[人: 주관]은 빼앗고 경계[境: 객관]는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이때 한 승려가 묻기를
무엇이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따스한 봄날에 만물이 소생하니 대지는 비단으로 덮이고 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 같구나."
무엇이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왕의 법령이 두루 천하에 시행되고 변방 지키는 장수는 봉화를 올리지 않는다."
무엇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이 끊기어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무엇이 사람과 경계 모두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제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 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그리고는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바른 안목[眞正見解]을 갖도록 해야 한다. 만약 바른 안목을 얻으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서 굳이 수승함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옛 고승들은 사람을 구하는 법이 있었다. 내가 사람들을 지도해 주는 것은 그대들이 속지 말라는 것이니 이 법을 쓰고자 한다면 다시는 의심하여 주저하지 말라. 오늘날 공부하는 이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는 병통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은 믿음이라는 확신이 부족하면 온갖 허망한 경계에 휩쓸려서 삶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쉴 수만 있다면 스스로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다. 조사와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들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다. 공부하는 이들이 믿음이 부족하여 그저 밖으로 내달려 구하면 그것은 모두 번지레한 문자일 뿐 결코 불조사의 뜻은 아니다. 지금 무심인연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생만겁토록 육도윤회하며 좋아하는 경계만을 따라가서 개나 고양이 당나귀같이 축생의 뱃속에 잉태하게 될 것이다.

삼계는 불타는 집과 같아서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죽음의 사신은 한순간도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대 선문납자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대들 마음속 한줄기 청정한 빛은 그대 집 속의 법신불(法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분별없는 마음의 빛은 그대 집 속의 보신불(報身佛)이며, 그대들 한 생각, 차별 없는 마음의 빛은 그대 집 속의 화신불(化身佛)이다. 교법은 三身을 최고의 경지로 삼지만 나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三身이란 그냥 말이며 세 가지 논리이자 빛의 그림자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빛을 희롱하는 그림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며 수도자들이 돌아갈 곳이다. 四大로 된 몸은 법을 말하고 들을 줄 모르며, 오장육부도 법을 말하고 들을 줄 모르며, 허공도 법을 말하고 들을 줄 모른다. 그렇다면 법을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눈앞에 뚜렷하면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법을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한순간도 끊어짐이 없으면 일체가 보이는 바 그대로이겠지만 정념(情念)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면 자체가 달라져 삼계에 윤회하여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 법계를 꿰뚫는다.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는 맛을 알고 말한다고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는 다닌다고 한다. 본래 밝고 정묘한 한 덩어리[一精明心]가 나뉘어서 6화합(6根, 6境, 6識)이 되는 것으로 주착만 하지 않으면 처처가 해탈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기연과 경계를 쫓아다니느라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신불·화신불을 앉은자리에서 끊는다. 10지만심(十地滿心)을 성취한 보살도 날품팔이하는 놈 같고, 등각·묘각도 칼 쓰고 족쇄 찬 꼴이며, 나한·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 같고, 보리·열반은 당나귀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그런가? 도 배우는 이들이 3아승지겁이 원래 비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묶임의 장애가 있다. 진정한 도인이라면 그저 인연 따라 묵은 업을 녹여 낼 뿐 부처님의 과보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조짐(兆朕)이다"라고 하였다.

참선 수행자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 그대들은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어찌하여 바깥으로만 분주히 허둥대면서 法을 구하려 하는가. 형상과 명칭 글귀를 따라 佛祖를 염원하고 선지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가 자기 머리를 잃어버려 분주히 찾다가 마음이 쉰 찰나에 아무 일이 없어졌다"고하였다. 그대들이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相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삭발 무리는 신령을 믿고 귀신을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굳이 맑고 흐린 날을 좋아하는데 이런 자들은 시주의 밥값을 청산하느라 염라대왕 앞에서 반드시 뜨거운 쇳물을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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