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문질품(問疾品)


5. 문질품(問疾品)

그때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에게 그대가 유마거사를 찾아가 문병을 하라고 말씀하자 문수사리는 "세존이시여, 그는 실상(實相)에 깊이 통달해 있으며, 가르침의 요지를 훌륭하게 설하며, 변설의 재주는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보살에게 필요한 작업[作法]을 낱낱이 알고 있으며, 모든 부처가 비장(秘藏)하고 있는 것일지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악마를 항복시키고 초능력을 자유로이 구사하며, 그 지혜와 방편은 초월의 경지[得度]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성지(聖旨)를 받았으므로 그를 찾아가 병을 묻고자 합니다." 이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보살과 부처님의 주요한 제자들 제석천·범천·사천왕들은 '이제 이 문수사리와 유마거사 두 사람이 담론(談論)을 하면 반드시 놀라운 법을 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8천의 보살들과 5백의 부처님 제자[聲聞]들, 5천의 천상의 신들 모두가 뒤를 따라 가고자 원하였다. 그리하여 문수는 수많은 보살과 부처님의 제자와 천상의 신들에게 싸여 바이샤알리 성으로 들어갔다. 그때 유마거사는 "지금 문수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곧 불가사의한 힘으로 방안에 있는 것들을 제거하고 하인들까지도 내보냈다. 방안에는 침상 하나만을 두고 그는 거기에 몸을 눕혔다. 문수가 재빨리 유마거사의 집에 들어서자 집은 텅 비었고 빈방에는 유마거사가 혼자 누워 있었다.

그때 유마거사는 "문수사리여, 어서 오시오. 온다고 하는 상(相)을 취하지 않고 왔으며, 본다고 하는 상을 취하지 않고 보았소.?" "그와 같습니다. 만약 와 버렸다면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며, 만약 가 버렸다면 다시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다고 하지만 좇아 온 곳[始發點]은 없으며, 간다고 해도 이르는 곳[到達點]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이는 것도 또다시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사님의 병은 참을만 하십니까. 치료를 잘못하여 악화한 것은 아닙니까. 세존께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물었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났습니까. 훨씬 오래 전에 걸렸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습니까." 유마거사는 "어리석음[痴]과 탐심(貪心)으로부터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누구나[一切衆生]가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이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으면 그때 나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세계에 들었고,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이 병을 떠날 수 있으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병들면 그 부모도 병들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중생이 병을 앓을 때는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또 이 병이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났는가 하면, 보살의 병은 광대한 자비[大悲]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유마거사님 이 방은 무슨 까닭으로 텅 비어 있으며 왜 시자(侍者)도 없습니까."
"공(空)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공이라고 합니까."
"그릇된 사유를 떠난 것[無分別]이므로, 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을 사유[想惟=分別]할 수가 있습니까."
"사유도 공입니다."
"그렇다면 공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그릇된 예순 두 가지 소견[62見]에서 구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릇된 소견[62見]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마땅히 모든 부처의 깨달음[解脫]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모든 중생의 마음[心行]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대는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든 악마와 온갖 교도들은 모두가 나의 시자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들은 생사의 세계를 바라고 있으며, 보살도 생사를 버리지 않고, 이교도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바라고 있으나 보살은 이 그릇된 견해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사님의 병세(病勢)는 어떻습니까."
"나의 병은 병상(病狀)이 없으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병은 몸의 병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몸의 병은 아니며,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므로 마음의 병도 아닙니다."
"사대[地水火風]중 어디에 걸린 병입니까."
"이 병은 땅의 원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땅의 원소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물·불·바람의 원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은 이 네 가지 원소로부터 생기며, 이러한 병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유마거사에게 물었다. "보살이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습니까."
"몸의 무상(無常)은 설하여도 몸을 염리(厭離)하도록은 설하지 않으며, 몸의 괴로움은 설하여도 깨달음[涅槃]을 바라는 일을 설하지 않으며, 몸에 자아는 없다[無我]고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 것을 설하며, 몸의 공(空)함은 설하여도 궁극적인 깨달음[畢竟寂滅]을 설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범한 죄를 회개 하도록은 설하여도 먼 과거로 들어가 사라진 것은 설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헤아려 남의 병을 동정하고 영원한 과거에 걸친 괴로움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자 뜻하고 중생이 닦은 공덕을 생각하며, 바른 생활을 뜻하여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명의(名醫)가 되어서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살은 이같이 병든 보살을 위로하고 기쁘게 할 것입니다."

"유마거사님 병든 보살은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을 다스리고 극복해야 합니까."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妄想)·집착·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 그러므로 병에 걸릴 것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 가지 원소가 결합한 것이므로 이름을 몸이라고 가칭(假稱)하였을 뿐, 네 가지 원소에는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으며, 몸에도 자아는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기는 것은 모두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가 있다고 하는 집착에 기인한다.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집착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면 곧 자아라고 하는 생각도, 살아있는 것[衆生]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어진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法]에 대한 생각도 일어날 것인데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은 수많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생(生)할 때에는 다만 물질 적인 것만이 생기고, 멸(滅)할 때에도 물질적인 것만이 멸한다. 또 이 물질적인 것은 서로 아는 일도 없으며, 생할 때에도 내가 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는 말 할 수 없다' 병든 보살이 물질적인 것[法]에 대한 상념을 떠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물질에 대한 상념도 그릇된 집착이다. 이 집착이야말로 마음의 커다란 병인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어떠한 것을 떠난다 하는가. 그것은 주체적 존재[我]나 주체적 존재에 속하는 것[我所]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체적 존재와 주체적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개의 상대적인 것[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두 개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그것은 주관, 객관의 온갖 존재를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해서 평등한 마음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평등인가. 주체적 존재도 깨달음[涅槃]과 함께 평등하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적 존재와 깨달음의 둘은 모두가 공(空)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공하다 하는가. 다만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 같은 두 가지 것[法]은 변함이 없는 실체성을 갖지 않는다. 이 평등함을 얻으면 다른 병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공에 대한 집착[空病]만이 남지만, 이 집착도 또한 공인 것이다'라고 인식된다면 병든 보살은 이미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하여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며, 또 부처의 가르침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한 감수하는 일을 버리고 깨달음의 경계에 들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의 몸에 괴로움을 받는 일이 있으면 죄의 과보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중생들을 생각하고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킬 것입니다. `나는 이미 괴로움을 극복하였으므로, 중생들도 극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다만 그 병은 제거하지만 물질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으며, 병의 근원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를 가르쳐 이끌어야 합니다.'

무엇을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대상에 대하여 마음이 작용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작용할 때 그것이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대상은 일체의 미(迷)한 세계입니다. 이 마음의 작용을 끊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때 마음은 대상을 향하여 작용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생각[二見]을 떠나는 것이며,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객관으로서 이들을 떠나는 것으로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은 것을 병든 보살이 그의 마음을 극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끊어 없앤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깨달음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지금까지의 수행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원수와 싸워 이김으로써 용감한 자가 되는 것과 같이 나와 남의 늙음과 병과 죽음[恐怖]을 없애는 것이 보살입니다. 또한 병든 보살은 이렇게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병이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그리고 그와 같이 내관(內觀)하면서도 여러 가지 사람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자비심을 일으켰을 때는 곧 그러한 생각을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번뇌[客塵煩惱]를 끊어 없애고 자비심을 일으키는 자이며, 집착에 의한 자비에는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나 만약 이 집착을 떠날 수가 있으면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어떠한 곳에 태어나더라도 집착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도 속박되는 일이 없고, 능히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바와 같이, 자기가 결박되어 있으면서 어찌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결박되어 있지 않아야 능히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집착해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을 속박이라 하고 무엇을 해방이라고 하는가 하면, 내관에 의한 조용한 마음의 기쁨[禪味]에 집착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입니다. 만약 훌륭한 방편을 갖고 중생을 접할 때는 보살의 해방입니다.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방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방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가 하면, 그것은 보살이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 교화하고, 공을 안으로 내관하며, 차별을 뛰어 넘고, 바라고 구하는 생각까지를 버림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이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라 하는 것은, 보살이 탐욕과 분노와 사견(邪見)등 온갖 번뇌에 얽혀 있으면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방이다 하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사견 등 온갖 번뇌를 떠나 많은 선근을 심는 것을 말함입니다. 이것을 가장 높은 부처님의 깨달음[阿욕多羅三먁三菩提]으로 나아가게 하는 회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지혜가 있는 방편이라 하며 해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이 병든 보살은 모든 것[法]에 대해 이같이 바르게 내관할 것입니다. 몸은 무상(無常)하며, 괴로움 가득 차고, 공(空)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非我]고 조용한 마음으로 내관하는 것을 지혜라고 이름하며, 몸은 병들었어도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몸을 내관하여 신체에 병은 붙어 있고 병도 신체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병이나 신체가 서로 선후(先後)가 없음을 지혜라고 이름하며, 가령 몸은 병들었어도 깨달음을 잃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고 합니다.
문수사리여, 병든 보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극복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동시에 마음을 극복하지 않는 일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이 극복하지 않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이며, 만약 마음을 극복하고서 거기 집착하면 그것은 자기만의 깨달음에 정진하는 성문(聲聞)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마음을 극복하는 일에도 극복하지 않는 일에도 집착[住]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멀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며, 미(迷)한 세계[生死]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오염(汚染)되지 않으며, 깨달음의 경계[涅槃]에 있어도 길이길이 깨달아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일도, 성자나 어진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닙니다. 보살만이 하는 일입니다. 보살의 행은 오염된 행도 청정한 행도 아닙니다. 모든 장애를 초월하고 극복하였음에도 더욱 많은 장애를 계속해서 극복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일체를 남김 없이 아는 지혜를 구하고는 있어도 수행의 도중에서 그것을 얻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또 모든 것은 공이라고 깨닫고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들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생존의 조건을 나타낸 열 두 가지 계열[十二因緣]에 대해서 깨닫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견을 가진 중생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중생을 자비심으로 사랑하고는 있어도 그 사랑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심신의 업이 다한 경계를 바라고 구하면서도 심신의 업이 다한 경계를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미(迷)한 경계[三界]에 스스로 나아가 잠기면서 사물의 진실한 본성[法性]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공(空)을 내관하면서 온갖 선의 부처를 심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차별을 초월하고 있으면서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바라고 구하는 생각을 버리면서도 생을 받아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인과(因果)를 끊고자 하면서 온갖 선행(善行)을 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여섯 가지 지혜의 완성[六波羅密]에 정진하면서 중생의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心心數法]을 아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초인적인 여섯 가지 능력[六通]을 행하면서 번뇌[漏]를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베풀고자 하는 네 가지 마음[四無量心]을 일으키면서도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탐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마음을 조용하게 쉬고[禪定], 집착을 떠나[解脫]고 마음을 통일[三昧]하면서도 그에 의하여 태어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조용한 마음의 네 가지 내관[四念處]를 행하면서 신체[身]와 감각[受]과 마음[心]과 존재[法]의 넷을 떠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을 행하면서도 계속해서 심신의 노력에 정진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네 가지 불가사의한 힘[四如意足]을 얻고자 노력하면서도 이미 자유자재한 초인적인 능력을 얻고 있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다섯 가지 뛰어난 능력을 가져오는 것[五根]을 행사하면서도 중생의 온갖 능력의 이둔(利鈍)을 아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이에 의해서 주어지는 다섯 가지 뛰어난 작용[五力]을 행사하면서도 부처님에게 갖추어진 열 가지 지혜의 힘[十力]을 구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깨달음의 지혜를 돕는 일곱 가지 수행[七覺支]에 정진하면서도 부처님의 지혜를 잘 이해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이행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깨달음의 길[佛道]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의 동요를 누르고 바르게 대상을 관찰하고자 노력하면서도 그 궁극에 있어서는 깨달음의 경계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모든 존재는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신체적 특징으로 스스로의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자기만의 제도를 정진하는 성자[聲聞]나 깨달음의 기쁨 속에 홀로 젖어 있는 부처[벽支佛]를 갖추었으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의 모습은 청정하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나라는 영원히 적정하며 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온갖 부처님의 청정한 나라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부처가 되어 가르침을 설하고 깨달음의 경계에 들면서도 더욱 보살의 수행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유마거사가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문수사리가 데리고 온 많은 사람 중에서 8천의 천상 신(神)들이 모두 가장 높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