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유마경 해제 녹취록
다음은 2004年 10月 우곡선원 유마경 해제에 따른 법상토론 한 장면을 녹취한 기록으로서 진정 참선공부가 어떤 것이며 선지식의 경계점검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우곡선원 참선공부의 생생한 현장 녹취록이다.
유마경 <제7품 관중생품>을 갈무리하면서,
학인 : 사리불과 법 거량을 하는 천녀를 어떻게 봐야하겠습니까? 천녀의 말은 부처님의 말씀과 별 차별이 없는 것 같지만 왠지 천녀가 부처님 같지는 않습니다.
선사님 : 사대를 갖춘 중생이라면 부처 같은 말을 하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렇지만 상대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고 둔갑을 짓는 것이 중생이다. 그 이유는 모든 존재가 덧없음을 달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마경의 천녀는 중생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제방에는 부처 같은 짓을 하는 천녀가 흔하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학인 : 부처와 천녀는 삼독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사님 : 무심과 번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겠지만 자칫 “번뇌가 지혜다”라는 말을 곡해하여 깨달아도 중생의 습성인 탐, 진, 치 삼독에 의거한다고 여기며 그대로 흘려버릴 위험성이 있다.
학인 : 중생입장에서 탐, 진, 치 삼독심이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는 탐진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선사님 : 말과 글은 모두 방편이지만 숨길 수 없는 자신의 마음모습이고 살림살이다. 사리불과 천녀가 주고받는 말에 대해서 수수방관하는 태도는 금물이다. 흑과 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무심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천녀의 탐, 진, 치를 간파할 수 있다. 부처가 중생과 똑같은 유형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삼독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화택이고 방편이다. 왜냐면 부처도 같은 시대를 살면서 숨 쉬고 밥 먹고 배설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입각하여 경전을 해제하지 않으면 천녀의 말이 부처인지, 부처가 천녀처럼 말하는 것인지를 간파하지 못하고 두루뭉실 넘어간다. 그래서는 부처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
여기서 흑과 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선한 말이거나 도덕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며 제도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흑과 백은 이익과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대와 소로 나눌 수도 있고 선과 악이 분명하지만 무심이 부수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용과 진실로서만이 중생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중생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여기 유마경의 관중생품을 제대로 꿰뚫었다고 할 것이다.
閑談 : 만물의 이치가 다 그렇듯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세운 것은 무너지고 또 모습 있는 것은 모습 없는 것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덧없지만 시간은 바쁘다. 우리 인간의 정신력, 즉 의지력은 적당한 긴장 속에서 한 방향으로 몰아칠 때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휴일은 내일을 위한 충전시간이지만 정신을 놓으면 거꾸로 휴일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조금만 방심하면 퇴보하기 때문에 적당히 긴장할 필요가 있다. 월요법회 때 보면 법회 동참자들이 대부분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휴일을 잘 보냈으면 생생하고 양양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은 어지러운 중생놀음 하느라 마음을 빼앗겨서 그런 것이다. 적당한 긴장으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이롭다고 생각한다. 특히 긴 연휴가 끝난 뒤의 법회는 대중을 이끌기가 아주 힘들다. 대다수 풀죽이 되어 맹한 것은 에너지가 방전되었다는 것인데 중생은 공부보다 놀고 쉬는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적당한 긴장은 정진에 효과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느라 다음단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 몸을 이끌고 살아간다는 것은 희 · 노 · 애 · 락과 함께하는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지 않는가. 편안함과 즐거움을 염원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성이다. 행복을 느끼고 유지하려면 안팎으로 요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과 같아 의도적으로 행복을 탐하여 성취하면 꼭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옛 성인들은 절대적 행복과 선도 없거니와 절대적 악도 없다는 진리를 영악한 현대인들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의 대가인 고통이 무서워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마장 없이 무난하게 살 수 있는 비법은 결국 상 없는 마음이고 언제나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이다. 성공과 행복을 경험하고 추구하면서도 취하려 하지 말고, 두려움과 고통에서 도망가려 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비추어 보는 힘을 기르면 이러한 삶의 마디가 바로 경계이고 찰나를 놓치지 않고 觀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이든 불행이든 어느 한편에 마음을 빼앗기고, 상을 일으킬 때 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 중생 살이다. 천하를 다 가져도 상없는 그것이 바로 무심이다.
우리가 깨우침의 지혜를 증장하고 유지하는 것도 이와 똑같다. 다 알아 이제 뭔가 되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기면 그 다음엔 추락할일 뿐이다.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 유마경 강설도 그렇지만 법사는 설법 후 상대로부터 확인 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 기억나는가?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진리는 방편으로서만이 설명할 뿐 꼭 그래야 된다는 정의가 있을 수 없다. 법을 설한 후 대중에게 비추면 자만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섭섭하고 마음을 다친다. 늘 모자란 듯해야지 자만하면 그것으로 부처공부는 끝이다. 오늘 여러분의 법회모습을 지켜보면서 활발한 토론도 좋지만 우선 법사는 논리 정연한 언어구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과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되씹어 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 수행정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야 만이 언제나 자유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학인 : 하버드대 출신으로 인도에 가서 마음수행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생활 원칙을 보니까 신문과 TV를 멀리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요즘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문과 TV를 멀리 했을 때 과연 일상에서 수행도 소중하지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가 볼 때 그게 충돌이 좀 일어납니다.
선사님 : 현실성이 있는 질문이다. 하버드대 나온 친구가 눈과 귀, 입을 틀어 막는 묵언을 부처공부로 삼아야 될 팔자라면 아직 전생 업장이 무겁기 때문이다. 진리세계는 하버드니 옥스퍼드니 하는 속세의 명패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세속의 학벌에 의지한 성현도 없거니와 해탈도 없다. 놓고 비우고 버릴 수 있는 힘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의 정도문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나라 선가에서도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경을 보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지식과 상식 없이 될게 뭐 있겠나.’싶고 ‘그런 정신력이 생사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겠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근기가 낮은 사람이 외부로 들어나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면세계를 맑히고 충실히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깨우침은 중심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호수가 고요해야만 맑음을 기대할 수 있다. 깨우침도 이와 같아 고요와 맑음을 체험하지 않고 부처를 말하는 것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평초와 같다. 지식사회에서는 첨단정보가 재산이 되겠지만 진리의 세계는 속세의 가치나 기준과는 완전히 반대다. 지식이 내 앞을 가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선정이고 무심지혜이기 때문이다. 앞서 경험한 지식 등이 맞닥뜨려진 상대를 가리지 않아야만 현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지혜지만 보고 듣고 말하지 않는 것을 공부로 삼아야 될 근기라면 그냥 소승이고, 성문연각이며 아직 보임 중이라는 뜻이다. 정법에는 취사선택이란 것이 없다. 법의 체성은 수용과 조화로서 말하거나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의지하여 내 마음에 맞추는 의타적인 공부나 새색시 같은 공부를 해서 뭐하나? 불도는 불문곡직하고 대장부의 길이다.
학인 : 수행에서 실수의 반복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쏟아지는 현대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고통 없이 발전을 도모하고 물들지 않는 지극한 객관이 되겠습니까?
선사님 : 나는 92년 3월 그때 이후 4~5년 동안 신문, TV는 물론 차속의 라디오도 못 들었다. 세상사는 이야기는 애시 당초 관심도 없거니와 머리가 아파 듣거나 볼 수도 없는 그야말로 몸은 속세를 살지만 뜻은 함께 할 수 없는 단절의 세월을 겪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그러한 과정을 겪은 것은 아주 유별난 이력인 셈이다. 현대사회는 1분 1초도 현실을 놓칠 수 없는 각박함의 연속인데도 이 모습으로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은 존재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체감하지 않으면 안 될 뼈저린 인고의 나날이었던 셈이다.
만약 나와 같은 과정을 겪는 것만이 정도라고 규정한다면 요즈음 같이 근본에서 어긋나버린 불교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불가사의한 경계체험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별스런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며 만약 사전 지식이나 방법을 조금이라도 추구하는 바가 있었다면 나와 같은 체험은 절대 불가능하다. 얼마 후 환하던 눈이 닫히면서 세상과 단절되었던 안타까운 세월을 언설로 다 들어 보일 수 없어 애석하지만 어차피 도는 문자와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 따라 지어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인연을 통한 간접경험이 자아를 회복하는데 훨씬 더 이로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똥도 닦는 다고 세월 죽이고 마음의 상처가 깊으면 이생에는 이루기 어렵다. 현실을 도외시한 부처공부는 시작과 동시에 천리만리로 어긋났는데 언제 무슨 힘을 길러 평정을 찾는단 말인가? 그래서는 어림도 없다. 그저 그런 짓을 전문으로 하는 인간일 뿐이다.
학인 : 선사님께서는 힘이 충만한 상태이셨고 그 이후에 경험을 하셔서 달관해 내셨지만 우리는 그런 힘도 없고 계속 바깥 것에 이끌리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좀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끄달리면서도 수행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선사님 : 특별한 힘이 있어 그런 경계를 체험한 것이 아니다. 전생업력이 시절인연을 지어준 것이다. 무아를 확실히 경험하여도 현실과의 간격을 좁히는 데는 각고의 세월을 요구한다. 대폭발이 있었다고 하여 육근, 육경, 육식이 여여한 것은 아니다. 몇 개월 반짝 무애 자재한 체험을 바탕으로 속진을 극기하면서 차츰 능수능란해 지는 것이며 앞선 각성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처음 반짝하였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알고 각론을 확립하느냐 차츰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경에 비추는 공부가 꼭 늦은 것도 아니거니와 약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운명의 단절 없이 이 공부를 한다는 것이 대복인줄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부터 제방에 나가 시험 삼아서라도 키재기를 한번 해봐라. 그래서 만족한다면 여기 오지 말고 그곳에서 교주노릇을 하여라. 관습적인 의례를 초월한 우곡공부에 의문을 가지는 것과 감정적인 종교의식을 못 잊는 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런 불교를 그리워하면 나하고 인연을 끊어야 한다. 각성은 종교논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단지 불법의 정체성을 위하여 좌충우돌하는 인생이 있을 뿐이다.
자기를 이기는 힘이라는 것이 남들이 100V인데 나는 200V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 긍정과 보시로서 순수의 힘이 양성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의 절대적인 믿음과 긍정심이 법력의 원천이다. 세상이 모두 아름답고 감사하여 달리 의심하여 대비할 필요가 없는데 왜 삿된 번뇌 망상을 짓겠는가. 마주치며 경험하는 낱낱의 것들이 새롭고 아름다운 극락을 사는 사람은 당연히 그와 같은 심신에너지를 겸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순리가 아니겠는가. 중생은 이러한 삶의 경험이 없어 의심하고 분별하느라 나와 남에게 이로움을 못주기 때문에 공덕이 없고 따라서 지혜가 모자라 결국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어두운 삶의 족적으로 말미암아 육경이 미덥지 않고 마음을 쓰고 거두는 역량이 신통찮다. 선정과 지혜가 모자랄수록 놓고 비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고 느끼는 대로 취하고 쌓으려 한다. 등짐이 무거운 소 일수록 길은 멀다. 부처공부는 마음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무상
도리를 터득하는 데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공부하는 참 선법이 인류사회에 기여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색과 공이 둘 아닌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든지 시대를 선점할 수 있고 모든
존재의 근본인
정신영역 진입에는 달리 요구조건도 없다. 사바세계는 세운만큼 반드시 무너지지만 해탈세계에 이르는 공덕의 힘은 염라대왕도 어쩌지 못한다. 지혜는 빌거나 구해서가 아닌 대 긍정심이고 수용과 조화가 근본이다. 삼독심이 녹은 여백만큼이 법열이고 지혜의 힘인 것이다. 여러분은 운명의 단절 없이 팔만사천 경구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문중에 이르렀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기 우곡선원은 얼빠진 신도양성소가 아니라 부처 만드는 공장이다. 마땅히 이에 걸 맞는 공부로 상응하여 모두 심안이 열려야 할 것이다. 몇 백년 사는 인생이 아니지 않는가?
밤이 깊었다, 그만 돌아가 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