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에 대하여- 29

 


<주간컬럼/2004-10-31>

Q : 보조지눌의 진심직설에서 열반은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고, 서산대사는 번뇌를 끊는 것은 성문연각이며, 번뇌가 생겨나지 않아야 만이 대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마경에서는 번뇌가 佛種子라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괴로운 번뇌를 끊고 부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까?

A : 번뇌(煩惱)가 보리(菩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육경(六鏡)이 상대세계에 물들지 않으면 생각 생각이 모두 정등각(正等覺)인 것입니다. 잡초와 병충해 없이 자란 벼 씨앗은 모두 일용할 양식이 되듯이 마음바탕이 고요하고 맑으면 생각 생각이 그대로 정념이고 보리지혜입니다. 중생은 세세생생 보고 듣고 맛보면서 길들인 훈습이 진(塵)이 되어 자성을 뒤덮은 것이 108번뇌인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허구를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근본번뇌는 탐, 진, 치 삼독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 마음을 다스려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해묵은 논의 잡초처럼 돋아나 진실과 정의가 없는 번뇌망상의 노예인생이 됩니다. 사바중생은 누구나 佛種子를 가슴에 품고 있지만 애써 닦아 가꾸지 않으면 생각 대부분이 사탐이어서 번뇌 苦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이고 무명이 곧 열반이라는 말은 佛道를 깨달은 조사의 명쾌한 禪철학이지만 낮은 근기로는 그 뜻을 헤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같이 물질이 풍부한 시대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쉬 일용할 양식을 얻기 때문에 진실상이 아닌 것들에 맛들이는데 익숙합니다. 한 조각 빵 때문에 배고픔의 설움을 겪어보지 않은 者에게 인생을 論하는 것은 무의미 하듯이 苦樂조차 초월한 경지를 지향하는 불교진리는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에 능한 하렬한 근기는 개밥에 도토리와 같습니다. 樂은 苦의 저편일 뿐이고 번뇌가 멸한 참 지혜는 苦樂을 뛰어넘은 절대고독, 즉 중심잡힌 삶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팔만사천 교설이 알음알이 밑천이고 불도는 구불타령이 될 뿐입니다.

번뇌망상을 무심지혜로 승화시키는 데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농부가 실한 추수를 하려면 시절에 알맞게 밑거름 내어 씨 뿌리고 병충해와 싸우며 김매고 가꾸어야 하듯이 대가없이 조사어록이나 경을 머리에 새기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번뇌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문을 가로막는 독이 됩니다. 사람답지 않은 부처 없듯이 진실과 정의, 보살행이 번뇌망상을 해탈지혜로 만드는 밑거름이 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수많은 번뇌의 성품이 空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 곧 번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법임을 말하고, 12부경에는 四相을 특히 강조하지만 핵심은 배고픈 아기가 엄마젖을 생각하듯 간절함이 골수에 사무쳐야만 일념처에 도달되는 것임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무심지혜는 아무생각 없음이 아니라 흑과 백, 고저장단, 선악이 분명하되 상대에 물들지 않는 것이고, 바라밀행이 없는 평상심은 번뇌망상보다 더 고질적인 無記에 떨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佛씨를 가꿀 문전옥답 서마지기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나태하고 피동적인 사람은 알곡(지혜)보다 잡초(번뇌)가 많으며, 신심이 돈독한 사람은 바깥세계에 대한 관심을 접고 문전옥답을 지극정성으로 가꾸어 날마다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모든 불교수행은 잡초를 뽑고 병충해를 다스리듯이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하여 내 마음의 땅을 알뜰살뜰히 관리하는 법과 같습니다. 자리이타는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바탕에 잡초가 무성하면 갈등과 고뇌가 그치지 않지만 실상관법으로 내면세계를 정화하여 마음의 힘을 증득하면 생각 생각이 바로 보리지혜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바라밀行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心을 내는 사람은 단멸과 단멸상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번뇌를 멈추고 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범부중생은 사사로운 욕망을 쫒기 때문에 생각 생각이 탐착이 되어 결국 번뇌의 과보를 받지만, 대인은 인류사회를 위한 염려가 항상하여도 달리 번뇌망상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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