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공부 요결 - 51

 


<주간컬럼/2005-08-28>

Q : 참선공부는 가장 어려운 불교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종교도 언어도 아니라는 참선은 문자 화두를 붙잡고 앉아 노는 것 같은데 왜 참선공부가 어렵고 아무나 할 수 없다고 합니까. 참선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등진 출가로 무위도식하며 화두문자나 붙들고 인생을 내맡기면 저절로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까. 화두로 병을 만들어 생고생하는 수행자들이 많은데 병고를 약으로 삼는 것이 불교공부입니까. 참선수행의 진정한 뜻이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마음자세로 참선공부에 임하는 것이 좋습니까?

A : 불교는 사생육도 사바중생을 해탈세계로 인도하는 인류최고의 교설이지만 참선은 석가부처님의 해탈정신과 삶을 집대성한 불교가 탄생되기 공겁이전 존재의 근원과 계합되는 법(法)입니다. 부언하자면 참선수행은 종교와 언설을 뛰어넘어 우주가 벌어지기 이전 태초의 순수세계로 귀의하는 고상하고 불가사의한 여정입니다. 해탈에 이르는 불교의 수많은 방편교설 중에 참선수행은 생사고해를 여의고 유. 무정 일체만유와 벌어짐이 없어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비법이지만 왕도는 없습니다. 말세중생은 형상이나 문자, 소리, 별스런 느낌이 아니면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섭리, 즉 진리의 실상을 깨우쳐 알지 못하기에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오매일여로 해탈인연을 맞이하는 참선공부가 어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선(禪)을 공겁이전이고 언어도단 불립문자 심행처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물리법칙이 그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심신(心身)의 근원인 원자(原子)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를 생성하는 참 선법은 해탈인연에 의한 이심전심으로서 전수되고 궁극의 가치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중생의 고질병인 분별망상에서 놓여나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 참선공부이지만 자성이 드러나는 돈오(頓悟), 즉 깨달음도 무량한 불세계로 진입하는 출발시점에 불과합니다. 탐착중생이 생사를 여의고 대자유인의 지혜덕목인 무상묘법을 증득할 때까지는 자성이 발동한 이후 8만4천의 허물을 벗어야하는 인고의 세월을 요구합니다.

불연이 닿아 숙세업장이 소멸되고 몰록 무심경지에 이르렀다면 굳이 참선공부를 할 것도 없이 삶 자체가 무심지혜와 자비공덕을 증득하는 일상이기에 곧바로 부처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직 업장을 닦아야 할 중생입니다. 사바중생은 무량겁 윤회세월동안 탐욕과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심과 용맹심으로 심층의식의 속성인 생존본능에서 놓여나는 참선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궐 같은 절집 기와지붕 아래서 시주 밥 얻어먹고 죽은 화두문자를 염염하면 5백생을 내리 닦아도 헛것입니다. 정각을 이룬 부처가 지금 같이 중노릇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불조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습니다. 참선공부의 본질은 깨달아 해탈열반에 드는 것이지만 불국정토를 위한 제불보살의 역사에 동참하려는 열정과 각별한 노력이 없다면 깨우침은 요원합니다. 구세제민을 위한 불조의 삶과 인생에 비추지 않으면 제아무리 닦아도 반연으로부터 놓여나는 해탈지혜가 생기지 않고 따라서 평상심이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이타의 삶 바라밀행이 진정한 참선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조혜능께서도 반연을 가리고 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애욕과 탐욕으로 인한 반연을 내려놓으면 망상분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참선수행의 기본은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해탈진리의 가르침에 비추어 마음을 쉬고 또 쉬는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이며 개시 허망한 삼라만상 존재이치를 골수에 새기며 탐. 진. 치 삼독심을 놓고 비우고 버리지 못한 깨우침도 무심지혜도 열반적정도 없습니다. 마음이 진정 쉬어지는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보다 값진 가치관, 즉 보살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열정이 있을 때 숙세의 반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 이와 같은 마음의 자세로 불교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참선수행이 또 하나의 질곡이며 놓기 어려운 업이 됩니다. 특히 선가의 화두는 독으로 독을 다스려 보겠다는 대혜 종고선사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화두경계를 타파하기는커녕 죽은 문자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악수였고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흐리게 하는 폐습으로 굳어졌습니다. 병고를 약으로 삼는 비참한 부처공부를 무엇 때문에 합니까. 참선공부를 잘못하였기 때문에 병마가 성하고 기성잡병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쾌청하지 않은 부처는 없습니다.

무심인연이 닿지 않으면 경전은 물론 보고 듣고 맛본 모든 인식과 감각들이 놓지 못할 멍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바중생의 숙명입니다. 특히 모든 종교는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끊지 못할 반연이고 어리석은 추종자를 만드는 근원입니다. 더구나 화두는 생각을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옭아매는 끈으로써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화두를 챙기라는 말에 세뇌되어 자나 깨나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불자들이 즐비한 수행풍토가 지금 같은 말법시대입니다. 청산옥계수도 고이면 썩습니다. 색신과 언어에 묶이지 않는 것이 화두타파이고 여래의 성품인 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전생공덕이 부족한 탓이지만 죽은 문자에 묶여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죄악으로 반드시 지옥 밑바닥에 떨어집니다.

달마대사께서 여러 반야(般若) 중에 ‘무심(無心)이 으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이 곧 성품이고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라는 뜻으로써 마음 앞에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부처공부임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또 유마경에서는 '심의도 없고 수행도 없으나 외도를 모두 꺾어버린다'라고 하였고, 법고경에서는 '만일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알면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죄도 복도 얻을 것이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나아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것 없다는 그것마저도 얻을 것이 없다'라고 하여 참선 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참선은 별스런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단지 마음을 쉬어 반연을 놓는 것뿐인데 이것이 범부중생에게는 죽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정법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생공력이 쌓인 독각(獨覺)은 홀연한 대폭발로 영원히 생사를 뛰어넘어 단번에 깨달음을 증득하지만 중근기는 닦아 망상분별을 걷음으로써 부처와 중생, 번뇌와 보리가 다르지 않음을 이치로 터득합니다. 그러나 하근기는 그저 빌고 매달리는 비천한 종교행위에 자족할 뿐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어지는 법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불성은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지만 닦지 않은 부처, 달마 없듯 참선공부로 해탈열반에 이르려면 인과를 믿고 신심과 지계, 의로움, 자비헌신의 보살행이 진정한 참선입문요결이며 그럴 때 불보살의 가호로 무심묘법을 체득할 수 있는 정법인연이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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