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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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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컬럼/2005-09-04>
Q :
처음 우곡선원에 입문하였을 때는 어려웠던 일들이 거짓말처럼 잘 풀리고 삶이 희망적이어서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참선공부를 잘하면 항상 마음이 안정되고 행복한 나날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일사천리로 잘 나가던 사업도 꼬이고 절친하던 사람과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은 물론 신경질이 잦습니다. 특별히 몸이 아픈 곳도 없는데 순간적으로 몸이 더웠다가 한기가 들면서 식은땀이 나곤 합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몸이 허하고 짜증이 나면서 신심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여법한 수행자이고 싶은데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현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하였던 초발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A :
업의 가로막힘이 없는 대자유인, 부처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구슬픈 통곡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경계에 이르러야만 겨우 숙세의 반연으로부터 놓여납니다. 한번 체험한 경계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 부처공부입니다. 지난 즐거움에 비추면 날마다 좋은 날일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 듯 잠시 주어진 행복도 탐하여 붙잡으면 마장으로 돌변합니다. 업보중생은 의지할 때 없는 경지, 즉 무념무상의 순수한 힘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덧없음이 뼈 속을 후려치는 처절한 경계체험을 통하여 무상 도리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 우리네 업보중생입니다.
불문에 귀의한 초심일 때 먹구름이 걷히듯 고뇌가 사라지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전생인연공덕으로 잠시 불보살의 가피력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법열이 솟구칠 때는 우주가 한줌 티끌로 보이고 서방정토 극락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사실을 통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사가 일사천리로 척척 풀리는 맛에 도취되면 수행이 답보상태에 빠져 믿음이 줄고 교만으로 열렸던 하늘이 다시 닫히게 됩니다. 천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자비헌신하지 못할 인간에게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해탈진리의 힘은 해당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찌든 사바중생에게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힘을 맛보이는 것은 신심을 돋기 위한 제불의 위신이지만 영험한 가피력도 타력이므로 서둘러 자력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각별하지 않으면 타는 갈애와 대안 없는 고통으로 담금질을 당하는 처지를 면할 수 없는 것이 해탈의 법도입니다.
한여름을 멋지게 살다가는 매미도 일곱 해를 땅속에서 등짝이 터지고 허물이 벗겨지는 인고의 소산입니다. 우리 탐욕중생이 넘어야 할 업장경계는 8만4천이며 낱낱이 허물을 벗어야 하는 운명과 맞물려 있습니다. 진리를 의지할 섬으로, 진리를 귀의처로 삼아 두 번 다시 의심하지 않는다면 희노애락이 삶의 필연적 경계이고 대소장단, 흑과 백, 선악이 진실상임을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삶 앞에 참선수행을 앞세우라고 말하였던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참다운 귀의처, 올바르게 인도하고 보호해 줄 유일한 권위는 몸소 경험하고 검증한 법(法), 즉 시비분별이 끊어진 진리세계의 체험이 가장 위대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도(道)가 석자면 마(魔)가 석자라고 합니다. 업보중생이 생사를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능력자가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 스스로 놓고 비우고 버리든지 아니면 제상(諸相)을 몽땅 빼앗기는 특별한 경계를 통하여 분별탐착이 끊어져야 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원칙입니다. 숙세의 반연에 꽁꽁 묶여있으면 서방정토 입성 티켓 법열이 무엇인지 무념무상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지 상상조차 못 할뿐더러 성찰과 진 참회를 할 수 없어 날마다 마음의 무게를 더하는 수고로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무념무상의 힘을 잠시 맛본 경험에 비추어 지금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은 행복한 투정입니다. 깨우침은 이유 많고 탈 많은 중생상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가혹한 동기부여가 선행합니다. 전생에 심어놓은 선근이 없었다면 마냥 그런 짓을 하는 중생일 뿐 대상없는 고행을 통하여 해탈경계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正道)인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초심자가 망념이 떨어지고 원이 쉽게 성취되는 등의 이적을 맛보지 않으면 참선법에 대한 믿음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잠시 행복보너스가 주어지지만 전생업장이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하루빨리 중생습기를 멸하고 번쩍이는 지혜를 갖추려면 정법에 의한 참선수행이 삶의 전면에 나서는 경지까지 근기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지금 같은 말법세상은 터무니없는 구도행위에 빠져 장님 등잔 기름 값 지불하듯 헛된 종교와 부처공부에 매몰됩니다. 초발심일 때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어렵고 힘들었던 문제들이 마치 신화처럼 술술 풀리고 원이 성취되던 것들이 어느 때부터 흐릿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하면 누구를 탓하거나 자책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과 행동거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무구한 세월 반연에 묶여있던 업보중생이 한번 번쩍하였다고 구경각에 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의 경지 평상심을 회복하기까지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무수한 장애를 만나며 때로는 뜻 모를 슬픔이 마음을 후벼 파고 가슴을 쥐어뜯게 합니다. 두 번 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분수령에 도달하면 삶도 무의미하며 대상 없는 번민으로 숨 쉬는 것조차 괴롭지만 당사자는 그것이 명현반응인 줄 알지 못합니다.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린 단절의 벽 그 너머에서 경험하는 절대고독의 세계에서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법도가 역대 모든 부처님의 구도역정이었습니다. 8만4천 일체경계를 뛰어넘은 부처는 사바중생과 함께 살지만 뜻은 결코 같이하지 않습니다. 길 없는 길 대자유의 세계를 가로막는 업장경계를 쉬 넘게 하는 최선의 방편은 일상이 공덕이 되는 자비헌신의 삶뿐입니다. 십주비바사론에 ‘선근을 심더라도 의심을 하면 그 꽃을 피우지 못하며, 신심이 청정한 자만이 꽃을 피워서 부처님을 뵐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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