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차문래 막존지해 - 53

 


<주간컬럼/2005-10-09>

Q : 깨달음을 얻는데 세간의 지식이 소용 닿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현대의 인간사회는 앞선 지식과 소양으로 행복의 성을 쌓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즐겁고 맛난 현실을 부정하는 불교수행은 한번뿐인 인생낭비이고 자신을 학대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성불이 수행의 목적이고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공덕으로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갖춘다고 말하지만 불교는 사회기여도 측면에서 미미한 역할밖에 못하는 것은 기득권층에 기생하는 종교이거나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나 소용되는 종교이기 때문인가요? 여러 종교집단 중에 유독 출가승들이 거만하고 속세를 떠난 것이 출가라고 말하면서 세상일에 더 관심이 많고 이기적인 것은 왜 입니까. 부모 벌 되는 재가불자들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승들을 보면 저러고도 부처공부가 될까싶은데 절집에 이런 비인간적인 문화가 존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법에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데 불교 가르침답게 살기 위한 전문불교인들의 비윤리적인 언사는 누가 제도합니까. 그리고 생식과 오후불식, 일종식, 장좌불와 등을 잘하는 불교수행과 연관 짓는데 부처공부는 원래 그런 것입니까?

A : 돈오(頓悟)는 색 · 공에 치우치지 않고 통하는 마음의 힘이기 때문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즉, 유무에 얽매인 세간의 지식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지식과 부는 쓸수록 줄고 권세는 탐할수록 업장이 무거워집니다. 누구나 맞이할 늙음과 병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할 때 지식과 부귀는 아무런 뒷받침이 되지못하지만 해탈지혜는 생사를 벗어나게 하고 쓸수록 빛나며, 천세의 밑거름이 됩니다. 또한 해탈의 지혜는 현실을 떠나지 않아 갈애가 없으며, 속세의 그 어떤 학식이나 권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고뇌가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인류평화에 기여한 자비공덕이 쌓여 해탈인연이 도래하며, 만일 그렇지 않는 불교라면 출세간을 빙자한 외도사마의 소굴입니다.

출세간의 삶은 이 사바세계에 아니 태어난 듯 살아가는 존재를 뜻합니다. 우리민족 정신문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가 타 종교에 비교하여 사회기여도가 뒤떨어지는 것은 왜곡된 관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출가사문이 돈과 명예를 탐하는 것은 날강도이고, 사회기득권과 영합하는 불교는 기생불교이고 썩은 귀족불교입니다. 더구나 불교진리와 동떨어진 엉터리 설법과 비도덕적인 승려들의 작태는 불교위상을 먹칠하는 패악이며, 재가자 위에 군림하려는 출가자들의 비뚤어진 관점이 계급을 조장하기 때문에 불교가 첨단시대로부터 외면 받는 것입니다. 출가를 현실도피나 가문의 영광, 전문직업으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정신장애입니다. 특히 지계를 지키지 않고 두타행을 하지 않는 출가자가 깨닫는 것은 털가죽 걸친 네발중생이 모두 성불한 이후가 될 것입니다. 심산유곡에 기대는 불도는 결함이 있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애달픈 모습일 뿐인데도 가출수도를 벼슬로 여기는 삭발원숭이들로 말미암아 불교의 정체성이 손상되는 것입니다. 윤리도덕관이 없으면 진리도 종교도 헛것이며, 철학적인 불교를 미신화 시키는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시대가 지금 같은 말세입니다.

성불은 탐착에 찌든 소아(小我)로부터 상대세계와 어긋나지 않는 무아(無我) 즉, 진아(眞我)로의 승화이기에 자신에게 엄격하고 진실하여 속진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힘을 요구합니다. 마음이 순수한 이후에야 진법이 새겨지고 위없는 지혜가 겸비되므로 수행자는 소욕지족과 일념정진, 주어진 현실에 감사할 줄 아는 낮은 마음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출수행은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 안 될 존재임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멍에를 쓰고, 고를 넘어서려는 의지의 화신이 되려는 애끓는 노력이 그 첫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 출가는 한 점 공덕도 없는 생의 배반자로 종말을 맞는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일종식과 오후불식, 생식 등으로 심신을 다듬는 노력은 자유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거리에 치우친 부처는 없습니다. 석가세존께서 오후불식을 하였다는 것은 인도의 기후조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걸식으로 수도연명하는 입장도 그렇지만 소식하며 나무그늘에 조용히 앉아 사색으로 정신을 기르는 것이 인도와 같은 토양에서는 훨씬 효과적인 마음공부가 될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특히 석가부처님이 거리에서 음식을 탁발하실 때 고기 등 무엇은 빼라고 분별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인데 계를 지켜야 할 승려 자신들의 처지를 부처에게 돌리는 교활한 무리들로 말미암아 별스럽고 신비한 불교로 채색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삼천년 전의 인도가 아닙니다. 나와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은 치우침과 억눌림이 끊어지고, 자비정신으로 사회정의를 앞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완성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참 선(禪)을 말하였고 참선수행을 통하여 해탈열반을 가능케 하는 것이 불교진리의 가르침이며 정신입니다. 해탈세계는 존재의 저편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무분별한 의식을 조화시킨 성스러운 생명력의 보고이며, 색 · 공에 무착하는 반야지혜로서 만이 가(可)할 것입니다. 속세의 가치관과 함께하지 않으려는 고행을 곡해하여 육신의 학대를 공부로 삼거나 출가수행을 특권과 결부 짓는 것은 한번뿐인 인생을 탕진하는 죄악입니다. 중생의 습기를 끊는 것이 죽기보다 더 어렵기에 차마 이겨내기 어려운 인고로써 탐욕과 분별, 의심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정법수행이며, 무심맛을 모르는 부처공부는 메마른 식견만 양산하는 문자공부일 뿐입니다. 부처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 잘뿐 굳이 무엇을 가려 선택하는 식생활과 별스런 수행방편, 빌고 구하는 비천한 종교행위와는 결코 짝하지 않습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자비헌신의 보살로 회귀한 삶이 성불의 씨앗이며 최상의 복전(福田)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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