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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심과 不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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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컬럼/2006-01-22>
Q :
인생에서 고(苦)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괴로움과 악운을 피하고 행복을 영위할 수 있습니까. 우곡선원에서는 ‘불도는 운명을 재창조하는 최고의 비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올바른 불교공부를 강조합니다. 참선수행을 하는 특별한 방법은 무엇이며 어떤 마음자세로 수행에 임해야 자성을 볼 수 있습니까?
A :
우리의 삶에서 괴롭게 부딪히는 것들 대부분은 인과를 모르고 인과를 믿지 않았던 과보에 의한 결과입니다. 악업은 반연을 양산하고 길흉화복을 결정지으며 행 · 불행을 구별하게 합니다. 좋은 국토, 좋은 부모, 좋은 스승 만나는 것도 업과에 의한 지복이고 해탈성불의 시절인연을 만나는 것도 결코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참 행복은 고진감래(苦盡甘來)이듯 인과를 믿는 사람은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자신이 뿌린 씨앗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상대를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여 반연을 확대,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앞세움이 있으면 이 세상을 모두 소유하여도 참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유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팎의 얽매임이 끊어진 무소유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이며 그것이 최선의 행복이며 극락입니다. 세상이치를 조금이라도 터득한 사람은 인과를 부정하지 않고 당면문제를 회피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살고 죽음이 둘 아닌 이치에 견주어 괴로움과 맞서는 용기가 고(苦)를 여의고 행복을 만드는 원천일 것입니다. 일상이 놓칠 수 없는 선(禪)이듯 행 · 불행은 마음에 있는 것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고통이 닥치면 그것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경계라는 사실을 감지하여 하심으로 때를 기다립니다. 반대로 인생이 순탄하고 부와 명성이 높아지더라도 이타행과 겸손을 잃지 않아야만 불운의 그림자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행복은 모두 지난 생에 지은 공덕의 산물입니다. 교만으로 경거망동하면 공덕이 힘을 잃고 따라서 행복은 새벽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자리이타의 공덕은 무심지혜의 밑거름이고 해탈열반의 초석이며, 바로 자신의 복전입니다. 석가부처님은 고통의 원인이 탐욕과 집착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선수행을 하면 인과가 선명함을 알기 때문에 이 사바세상 그 어떤 것도 탐하여 붙잡지 않습니다. 벌어지지 않으면 탐욕에 사로잡힐 원인이 사라지고 따라서 반연이 범접하지 않아 일상이 모두 공덕이고 행복이며 그대로 여여(如如)한 경지입니다.
우곡선원에서 불도는 운명의 창조자로 거듭나는 비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불도를 닦으면 고뇌를 여의고 심신이 안락해지는 체험에 입각한 것입니다. 8만4천 교설이 생사를 희롱하는 비법이지만 무심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애써 구하여도 진실하지 못하고 자신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 팔자를 고치는 보살의 원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자비원력으로 무심씨앗을 얻지 못하면 상대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줄고 늘어남도 없는 존재의 참모습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분별과 탐욕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의 실상을 종교라고 말하는 이 말법시대에 종교를 뛰어넘어 저자거리에서 실사구시 하는 해탈인연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심을 체험하기 전에는 모든 수행노력이 교와 유위, 환(幻)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유위상으로는 결코 생사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진여자성을 보아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지 못한 구세제민은 요원한 꿈이며, 운명의 재창조는 무위행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휩쓸어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지 않다면 불교공부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결코 부처를 찾을 수 없고 따라서 무심복락은 아득합니다.
참선공부에서 특별한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혈맥론의 심외무불성(心外無佛性)에서 깨달음은 자기 마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늘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을 수 없고 유위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고 마음에 앞세움이 있으면 결코 부처를 만나지 못한다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또,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는다.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성(自性)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자성을 보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를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스런 과보를 받겠지만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다.
자성을 보지 못하면 경전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삼생동안 내리 닦아도 헛수고이다. 나고 죽는 일이 중대사이니 인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 진기한 보물이 가득하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더라도 눈을 뜰 때에는 보이거니와 눈을 감은 뒤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유위의 법은 꿈이나 허깨비와 같다.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스승인연이 없으면 끝내 자성을
알기 어려우니 스승을 만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아직 확철대오하지 못하였다면 반드시 선지식에게 간절히 구하여 마음이
열리게 하라. 자성을 떠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우침 밖에서 자성을 얻을 수 없듯 부처가 곧 자성이다. 라고 하여 밖을 향한 마음을 놓은 것만큼 효과적인 참선공부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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