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우의 울음소리 - 56

 


<주간컬럼/2006-02-12>

Q : 우곡선원은 무슨 불교종단이며 어떤 종지를 따릅니까? 牛谷은 무슨 뜻이며, 우곡선원의 탄생배경과 실천수행력, 시대적 역할에 대해서,, 석가부처님 열반으로부터 5백년 정법시와 상법 일천년이 지난 말법시에는 소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부터 정법이 재현되고 그곳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불교계의 구전과 시중의 유명한 예언서에 비추어 볼 때 牛谷禪院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소 울음소리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A : 本 社團法人 牛谷禪院은 한국의 무슨 종파나 종단, 외국의 그 어떤 종교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곡선원은 석가부처님의 해탈법과 보살정신에 입각하여 깨달음을 얻고 바라밀행으로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국가공익단체로 지정된 사단법인입니다. 시대를 계도하고 더불어 성불하기 위하여 회향의 즐거움을 가르치고 실천적 자비희사가 불교정신이며 진정한 불도입니다. 초조인 석가부처님은 무슨 불교종단을 만들거나 종파에 의지하여 심신수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불교종단은 대다수 옛 중국의 특정조사를 종조로 삼아 그들의 불교관을 답습하려는 임의단체입니다. 굳이 우곡선원은 무슨 종지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석가모니宗”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불교공부를 합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해탈열반과 구세제민을 시연한 석가부처님의 법에 입각하여 부처가 되는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중국의 조사들을 불교수행의 종조로 앞세우는 것은 초조인 석가부처님의 깨달음과 자비공덕, 열반의 참뜻을 분명히 해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진리는 시대와 사람에 상관없이 연기하는 제법실상과 하나가 될 때 생사를 그치고 대원경지를 증득하는 너무도 쉽고 지극히 당연한 시스템입니다. 더불어 사바중생을 위한 이타행과 측은지심은 지극한 사랑이고 참인간의 도리입니다. 이러한 수행공덕으로 복된 삶이 되어지는 해탈법은 영원히 숭엄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를 왔다가신 세월이 3천년도 넘은 말법시대입니다. 구불타령은 방방곡곡에 넘쳐 나지만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법향(法香)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금부처를 앞세워 무위도식하는 하열한 가문에 해오(解悟)는 요원한 꿈이고, 불도량이 마왕자손들의 영업장이고 아방궁으로 둔갑한 현실에서 어느 누가 정각(正覺)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하여 진리의 장명등을 밝힐 것입니까. 할 수 없어 우곡선원이 탄생되어진 것뿐입니다. 길 없는 길을 홀로 걷던 절박한 구도자에게 불보살께서 묻기에 우직한 “소[牛]”라 하였으며, 스스로 낮아 곡(谷)이라 하였던 절대고독의 10년 세월이 흐른 어느날 사단법인 우곡선원이 진정한 불법(佛法)의 보고로 우뚝 선 것은 이 말법시대의 사바중생에게는 더 없는 행운일 것입니다. 소(牛)는 백방에 이롭고 곡(谷)은 스스로 낮지만 만물이 모이고 생기를 북돋게 하니 우곡(牛谷)은 그 이름만으로도 현묘할 뿐더러 시방세계에 가장 이상적인 부처님들의 처소이고 보살행의 귀감이 된 것은 역대 제불보살의 뜻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가의 비기로 불리는 참선곡(參禪曲)에 “유지장부(有智丈夫)는 잘 살피시오, 철우(鐵牛)가 우는 소리를!!”이라는 한 줄 의미심장한 글귀가 말미를 장엄하고 있습니다. 참선곡은 작가미상의 오도송으로써 해탈문의 지침서와 다름없지만 사마외도들에게는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글귀이기에 절집벽장에 깊숙이 가두어졌을 것입니다. 태백산의 모 고찰에서 참선곡 필사본을 입수, 해제하여 우곡선원 홈페이지 참선요론에 올려놓으니 왜 牛谷으로 명명하였는지 그 당위성이 혜성처럼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삼계(三界)에 물든 고질병으로 여섯 문이 막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제법실상과 자재로 회통하지 못하는 존재가 업보중생입니다. 불조의 정맥이 끊어진 가문은 영혼장사판 일색이고 혹세무민의 온상입니다. 출출세는 고사하고 가로세로 울타리를 치고 상에 빌붙어 주야장창 세상을 속이는 일에 몰두하는 문중에 부처님의 적손이 탄생할리 만무한 이치입니다. 부처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말법시대는 소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부터 올바른 진리가 행해지고 사바중생을 거듭나게 하는 해탈법이 재현될 것이라는 구전은 눈 밝은 선지자들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1992年 3月 壬申年 속세를 벗어난 초야라는 뜻을 지닌 강원도 속초에서 홀연히 소울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땅에 불(佛)씨를 심어 구세제민(救世濟民)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의 요청으로써 불가(佛家)는 물론 정신세계의 신기원이 될 것입니다.

무심지혜는 박학다식이 아니듯 선문답 또한 지식과 상식을 재는 척도가 아니라 불도수행자의 안심을 점검하고 줄탁동시와 같은 동기유발을 기대하는 선지식의 방편설입니다. 분별망상과 구구한 사유체계를 한방에 뛰어넘는 기발한 선문답이 맞고 틀린 것을 가름하는 인가의 잣대로 변질된 것은 선가역시 말법세상을 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시절이 수상하니 언어에 기대지 않는 선문에 가당치도 않는 인가라는 풍조가 만연하고 그런 짓으로 종문의 계통적자로 삼는 것은 눈물겨운 말세법현상입니다. 석가부처님은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바 없습니다. 만약 알에서 갓 부화하는 기러기가 처음 본 것이 산골 중이었다면 중 같은 짓을 하려는 기러기가 될 것이기에 본래면목을 회복하려는 해탈문중에 인가라는 각인은 어불성설입니다. 육문(六門)이 청정하고 육경(六鏡) 육식(六識)이 밝고 또렷하다면 굳이 교법이니 선법이니 할 것도 없이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문수, 보현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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