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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아정과 不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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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컬럼/2006-08-27>
Q :
다사다난하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는 마음이 안정되기 어려운 구조인데 불교를 잘 믿으면 상락아정에 들 수 있습니까? 해탈열반이 보편적인 일상에서 구현되는 진리적 삶이라면 부처님의 몸과 정신은 중생과는 판이하게 달라야만 할 것 같습니다. 오욕칠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은 현대사회와 어떻게 적응하며 고독한 생활과 감정 없이 희노애락을 겪는 삶은 무엇입니까. 불교경전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 깨우치고 해탈지혜가 생기는 것입니까. 부처님과 같은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A :
불교를 믿는 신앙심만으로 반야지혜가 생기고 상락아정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보다 먼저 성불을 이룬 선각자의 삶과 해탈정신을 집대성한 철학적인 요소가 강한 종교입니다. 인간불사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헌신이 돈오와 해탈지혜의 씨앗입니다. 해탈열반은 경전에 예속되는 것이 아닌 일체법과 찰나에 즉(卽)하는 성성한 마음의 회복입니다. 아(我)를 앞세우는 식(識)이 변화무쌍한 현실세계를 수용할 수 없어 고(苦)가 생겨나며 따라서 상대분별로 인한 무명식이 자성을 가로 막아 바로 여기 지금이 극락임을 깨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리세계를 가로막는 숙업을 해결하고 만유와 동사섭 하는 참 나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은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불법(佛法)에 대한 믿음과 일념정진으로 마음의 힘이 길러지면 정견(正見)이 되며 따라서 시방세계 일체법이 둘 아닌 불이(不二)임을 통감하는 경지가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불교경전을 잘 이해하는 식견으로는 결코 둘 아닌 이치와 계합되는 불이문(不二門)에 들 수 없으며 따라서 궁극의 열반적정은 불가합니다.
깨우침이 고독한 삶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각자(覺者)는 인간적인 감정교류나 정리를 앞세우지 않아 오욕칠정으로부터 초연하기 때문입니다. 들숨날숨이 교차하는 찰나에 저승사자와 마주치는 것이 인간사이기에 허망한 감정의 끈인 정리와 마음의 장애가 되는 반연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희노애락에 휘둘리느라 해탈의 자유를 모르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지복을 까먹는 어리석음 입니다. 속진을 단절하는 용기가 분별탐착에 물든 아(我)를 극기하고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체득하며 그로부터 생사고해를 면하는 불이문(不二門)에 들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둘 아닌 한마음 작용임을 체득해야 만이 비로소 고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쉬어지는 것은 만고불변입니다. 경전으로 익힌 지식으로 마음의 평정을 바라는 것은 돌부처가 아이 낳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삶 앞에 자비헌신을 앞세우는 보살정신이 일상화될 때 공덕이 쌓이고 비로소 지혜가 태동되는 이유는 탐욕중생의 마음터전에는 해탈의 씨앗은 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우침은 요란스런 현대사회를 등지고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현실과 벌어지지 않는 순수를 심연에 새기는 극적인 시절인연입니다. 탐착과 편견에 사로잡힌 아(我)로부터 대우주와 하나 된 무아(無我)로 거듭나는 깨우침은 역대제불의 가호가 깃든 위대한 인간불사이지만 수혜자의 정신과 육체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돈오 이후 중생의 습기가 사라지는 세월동안 수천수만의 경계는 살아서 지옥과 극락을 오가는 가혹한 여정입니다. 무념무상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심안(心眼)이 처절한 인고의 소산인 것은 어리석은 중생놀음에 맛들인 숙세업장을 끊는 피 말리는 과정을 수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육안(肉眼)은 속진세상 이해득실이 아른거리지만 심안(心眼)은 마음에 가려짐이 없어 일체법이 평등하여 죽고 사는 생사에도 여여 합니다. 육안은 고정관념으로 상대법을 읽고 이해하기 때문에 육경(六鏡)이 흐릿하지만 심안은 심파(心波)로 연기 유전하는 제법을 형상과 시공을 뛰어넘어 인식하기에 부질없는 세파에 물들지 않는 단호하고 맑은 마음을 유지합니다.
불교경전은 깨달음을 위한 신통묘약이 아닌 업보중생을 위한 궁여지책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식에 의한 이심전심으로 득하는 개오(開悟)가 정석이지만 지금은 정법인연이 멀어진 시대이기에 불조사의 교설을 집대성한 경전으로 알음알음 해탈 길을 모색하기 때문입니다. 무심경계를 득하여 불교경전과 중노릇을 초월하였던 역사는 정각자의 표상인 신라의 원효와 당나라 혜능대사를 통하여 증명됩니다. 등각지에서 마주친 불교8만4천경은 맑은 거울에 비추이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아 12부경이 아주 쉽고 익숙합니다. 희유하지만 먼저 깨닫고 경전에 비추는 독각(獨覺)도 있으며 대다수 점수(漸修)로 차츰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이 불도입니다. 불교경전은 자기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을 때 비로소 올바른 해탈세계관이 형성됩니다. 만일 보살도에 입각한 실천수행력 없이 경구에 심취되면 법과 법 아니라는 이생에는 치유 불가한 법마(法魔)에 빠집니다. 죽는 것도 옳듯 이 세상에 법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인과연기법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가 삶의 질을 가름할 뿐입니다. 해탈세계는 고불고조와도 함께하지 않거니와 구불타령과 먹물로 익힌 똑똑한 지식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해탈지혜는 생성 소멸하는 제법실상과 어긋나지 않는 마음이기에 따로 세울 법과 행복도 없습니다. 천지만물 일월성신이 나와 다르지 않는 불이문(不二門)에 들어선 것이 위없는 행운이고 모든 부처님의 참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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