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유아독존 - 58

 


<주간컬럼/2006-12-24>

Q : 불교는 석가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시던 날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한손으로 하늘을 다른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내가 가장 높고 존귀하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쳤다고 말합니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구원종교에서나 있을 법한 부처님의 탄생설화는 사실적이고 과학적 기반 위에 존립하는 불교진리에 대한 믿음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는 것 같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제 발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말이 안 되는 석가부처님의 탄생 이야기는 불법의 정체성과 불교 이미지를 훼손시킨다고 봅니다. 불교의 표상처럼 회자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올바른 뜻은 무엇입니까?

A : 불교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생물학적인 나[我]가 아닌 생사유무 일체의 상대성은 물론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한 무한세계관을 도식화한 낱말입니다. 대우주 일체만유와 한 티끌도 어긋남이 없는 사유체계, 즉 해탈진리와 계합된 참 나[我]를 회복한 깨달음의 경지가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삼라만상이 쉼 없이 생성소멸 연기하는 대우주의 섭리와 계합하는 한량없는 마음이 참 나[我]였음을 깨우쳤던 환희지는 적절한 비유대상이 없습니다. 영생불멸의 불성(佛性)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인 빛에너지와 융합되는 불가사의한 경계체험이 대각(大覺)이기에 천상천하유아독존도 광대무변한 불교의 해탈세계를 표현하는데 부족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설화는 위없는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헌신적인 석가부처님의 삶과 숭고한 가르침이 전생원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의인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과가 분명하고 철학적 기반 위에 존립하는 불교가 신비와 미신으로 뒤범벅된 여타 잡동사니 종교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세존의 삶과 해탈세계관의 집대성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닦을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사바중생은 보고 듣고 맛들인 훈습이 원래 청정한 육경(六鏡)을 뒤덮어 늘 분별시비와 번뇌 망상에 시달립니다. 참 나[我]를 회복하지 못하면 제왕(帝王)도 마왕(魔王)의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가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 고뇌와 갈등, 시비분별로부터 해방되어진 대자유인이 되어져야 마땅합니다. 딱하게도 가장 귀하고 높다는 인간은 풀만 먹는 코끼리보다 덩치가 작고, 황소보다 힘이 약하며, 호랑이보다 민첩하지 못할뿐더러 개보다 냄새를 못 맡고, 쥐보다 귀가 어두우며, 공중과 물속을 자유자재하는 새와 물고기보다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영악한 인간은 물질문명을 발달시켜 편리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무한우주시간에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근심과 만년탐욕을 걸머진 어리석고 가련한 생명체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석가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육도중생이 득실거리는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으신 것은 참 나[我]를 회복하여 생사윤회를 그치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해탈법을 우리에게 일러주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의 참 나[我]는 어디서나 주인공으로 살며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더 밝고 높은 지혜의 밑거름이고 일상이 공덕이 되는 복된 삶을 말합니다. 그는 삼업(三業)이 청정하기에 생사고락이 겹치는 이 사바세상을 살지만 상(相)이 없어 업(業)이 남지 않기에 대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업보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자성(自性)은 세세생생 모자람이 없는 무진보배로서 사바중생은 누구나 품고 있습니다. 줄탁동기로 자성을 회복하면 전생숙업이 소멸되기에 저잣거리 범부처럼 속세를 뒹굴어도 영생불멸의 해탈진리와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석가부처님께서는 탐욕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 무진보배를 얻는 법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여덟 가지 장애[八難]를 말씀한 바 있습니다. 첫째: 온갖 지옥고통을 받느라 부처님 법문을 듣지 못하는 지옥난(地獄難)에 빠진 경우. 둘째: 축생의 몸을 받아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수 없는 축생난(畜生難)을 겪고 있는 경우. 셋째: 오직 먹는 생각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아귀난(餓鬼難)에 빠진 경우. 넷째: 장수천난(長壽天難)으로 수명이 오백겁이고 즐거움이 가득한 색계의 제사천(第四天)에 빠져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 다섯째: 수미산북쪽 구로주(俱蘆洲)라는 온갖 쾌락이 넘치는 울단월난(鬱單越難)에 빠져 부처님 법문을 들을 여지가 없는 경우. 여섯째: 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으로 이 세상지식과 이교에 마음이 팔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여념이 없는 경우. 일곱째: 농맹음아난(壟盲音啞難)으로 눈멀고 귀먹고 맹아인 경우. 여덟째: 불전불후난(佛前佛後難)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시기 전이나 가신지가 오래되어 믿음과 법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팔난(八難)은 경전 속의 과거 미래이야기가 아니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지금 바로 여기 우리 사바중생의 마음자세와 생활태도를 경책하는 비유설입니다. 비록 건강한 육신과 똑똑한 지능을 가졌더라도 세상잡사에 현혹되고 탐욕에 빠지면 해탈진리는 돼지 코에 진주목걸이나 다름없고 심오한 불법(佛法)을 도무지 요해할 수 없어 팔난(八難)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더하여 생존환경이 척박한 시운을 타고났다면 아무리 구도열정이 끓어 넘쳐도 진작 깨우침은 요원합니다. 인류역사에서 지금 같이 안정적이고 편리한 문명을 누리는 인간사는 없습니다. 배고픔과 헐벗음이 없고 기회와 평등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사회에 태어난 것은 인간완성의 길 깨달음을 손아귀에 움켜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영원불멸의 진리 불교의 해탈세계관은 누구나 입성 가능한 그냥 놓고 비우고 버리면 되는 무소유처 무소유심을 말합니다. 온 세상을 다 가졌으나 마음에 한 티끌도 지닌바 없는 무소유의 힘을 증득하였다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선택받은 사람의 특별한 아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당연한 권리이자 사유체계이고 인격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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