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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가피력과 실상관법 - 59
<주간컬럼/2007-06-03>
Q :
석가부처님은 해탈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그분의 명호를 불러도 가피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즘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만 열심히 부르면 소원성취를 하고 지장보살 명호를 부르면 지옥은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아무 곳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데 구차스럽게 사찰이 왜 필요합니까? 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기도에 매달리는 불교공부도 해탈지혜가 생기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우곡선원의 실상관법과 부처님의 가피와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A :
석가부처님은 누구에게 가피(加被)를 주고 말고 하는 신앙적 존재가 아닙니다. 불도(佛道)의 궁극인 해탈열반은 중생숙업이 소멸된 한량없는 세계관, 즉 무심지혜를 말합니다. 49년 동안 중생구제 설법을 하신 석가부처님께서 한 말씀도 한바 없다고 선언한 것은 마음 앞에 부처는 물론 그 무엇도 가려진 것이 없어야만 살며 마주치는 모든 것이 새롭고 분명한 극락에 닿기 때문에 위없는 도리를 설파한 자신의 존재마저 스스로 삭제하였던 것입니다. 석가부처님의 명호를 불러 가호(加護)를 바라는 것은 불교와 해탈에 대한 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불도는 자기중생을 제도한 반야지혜의 힘으로 생사가 겹치는 분별지옥을 면하고 스스로 소소영영한 극락정토를 만들어 누리는 운명의 재 창조자가 되는 길을 일러주는 이심전심법입니다. 누구로부터 가피를 받기 위한 불도수행은 크게 어긋난 것이며, 자등명 법등명으로 생사를 초월하는 해탈의 법을 깨닫는 것이 무량대복이고 가장 큰 가피입니다. 제불보살은 물론 아미타불과 관세음 등은 현재 미래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깃들어있는 불성(佛性)의 체(體)와 용(用)을 나타내는 불교적인 의인상입니다. 사바중생이 해오(解悟)로 탐욕과 분별, 의심이 사라지고 자비헌신의 바라밀행을 할 때 아미타불과 관세음은 물론 약사보살 지장보살 등등 불교교리에 등장하는 8만4천의 영험한 보살과 다를바 없는 신통한 능력이 생겨납니다.
일상적인 참회정진공덕으로 정법인연을 만나는 것과 본래면목인 불성을 일깨워 전쟁숙업을 소멸하는 것이 진정한 불보살의 가피이고 복락일 것입니다. 마음 밖에서 구하는 것은 석가부처님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외도사마의 법이며 인생을 낭비하는 공염불입니다. 특히 주문을 외우듯 반복하여 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마치 무아경지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것은 어디서나 성성적적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이 아니라 놓기 어려운 습기가 되어 닦을수록 더 어둡고 해탈은 아득합니다. 지금 같은 오탁악세에는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불조(佛祖)의 정법은 시간과 공간에 저촉받지 않는 심법이기에 처음 그대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란한 무늬에 속아 석가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만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말세증후군에 휘말리는 영혼도 가련하지만 굳이 가피를 원한다면 부처장사치 소굴을 찾을 것이 아니라 청수 한 그릇 떠놓고 집에서 마음을 모으는 것이 소원성취에 이로울 것입니다. 돈오를 촉발하는 시절인연이 닿는 것은 전생공력의 화현이며 평정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참다운 불도수행은 무소유심을 증득한 정법인연을 만나 자기중생을 극기하고 가피력을 발휘하는 대자대비보살로 운명을 재창조하는데 있습니다. 이생에 불연(佛緣)을 만나 생사경계를 뛰어넘은 무심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내세에도 극락세상은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왜냐면 해탈열반은 이승에서 경험하는 유여열반과 사후로 이어지는 무여열반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옥고가 두려워 지장보살 명호를 부르며 구원을 바라는 간사함도 저승 명부전에서 혹독한 과보를 받지만 구원종교에 빠져 인생을 낭비한 죄업은 그 누구도 구제하지 못합니다.
불연이 닿은 이승에 최상승의 깨달음을 얻고 대자유인으로 극락왕생하는 그 이상의 복락과 부처님의 가피도 없을 것입니다. 우곡선원의 실상관법(實像觀法)은 모든 존재의 근본인 빛을 관(觀)함으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되는 최상근기를 위한 심신수행법이자 위없는 불보살의 가피력입니다.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석가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빛을 관(觀)하는 것은 바로 극락세계의 무량수불(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관(觀)하는 것이며, 업장을 말끔히 소멸하고 부처님 앞에 태어나는 법이니 잘 기억하여 잊지 않도록 명심하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영생불멸의 극락도 그렇듯 지옥 역시 주관하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동산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생사고락에 휘둘리지 않는 영생복락과 절망과 두려움의 고통뿐인 무간지옥이 결정됩니다. 만약 자신의 마음동산에 부처 보살은 물론 무슨 중이나 문자화두 등이 자리 잡고 있다면 불교수행이 오히려 죄업이고 또, 탐욕과 이기심이 마음동산을 뒤덮고 있다면 그것은 애써 삼악도(三惡道)를 꿈꾸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일체만유의 근본이자 무궁무진한 조화성과 지고한 에너지이며 존재의 근본인 빛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동산을 꾸미는 우곡선원의 실상관법이 아니면 무엇으로 말세중생의 질긴 숙업을 멸하고 열반적정에 들것입니까. 참 사람답지 못한 부처는 없습니다, 육경(六鏡)이 청정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진실일 수 없어 시대의 주인공이 아닌 한줌 공덕도 없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 자신이라는 신(身)구(口)의(意)가 자리이타의 선업(善業)을 행하지 못하면 지혜공덕이 미약하고 따라서 자유자재로 가피력을 구사하는 원만보살의 삶이 되지 못합니다. 먼저 깨닫고 그 후 불교경전을 통하여 입증된 본원의 실상관법은 능히 잘 알아 육경을 덧칠하는 이 말법시대 업보중생의 고질병을 치유하는 비법이자 석가부처님의 지중한 가피력입니다. 본원의 실상관법은 한국불교 수행법 편람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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